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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이' '초멘나사이'… "언어 섞으니 한국 일본이 한 뼘 가까워졌죠"

입력
2024.05.04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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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112>한일 언어융합 현상, 한본어·일한믹스어의 급부상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일부 부정적 시간에도 불구,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본어 현상은 한일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키워온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기성세대가 반세기 넘도록 풀지 못한 역사적 앙금은 여전하지만, 문화적 친밀감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부 부정적 시간에도 불구,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본어 현상은 한일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키워온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기성세대가 반세기 넘도록 풀지 못한 역사적 앙금은 여전하지만, 문화적 친밀감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 ‘한본어’ 혹은 ‘일한믹스어’, 한일 젊은이들의 언어유희

한일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어법이 유행 중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대중 문화에 푹 빠진 10대 청소년들이, 한국에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이 트렌드의 선두에 있다. 한국에서는 ‘한본어(韓本語, ハンボノ, 한국어의 ‘한’과 일본말의 ‘본’을 딴 신조어)’라고 많이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일한믹스어(日韓ミックス語)’라고도 부른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한본어라고 부르겠다.

일본에서 ‘안녕하세요(アンニョンハセヨ)’, ‘괜찮아요(ケンチャナヨ)’, ‘맛있어요(マシッソヨ)’, ‘사랑해요(サランヘヨ)’ 정도의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로 배운 적이 없어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가와이이(可愛い, 귀엽다는 뜻의 일본말)’나 ‘오이시이(美味しい, 맛있다는 뜻의 일본말)’ 정도를 모르는 젊은이는 드물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에는 일본의 로맨스 영화 '러브레터'(1995년)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오겐키데스카~(お元気ですか, ‘잘 지내나요?’라는 뜻의 일본말)”라는 이색적인 인사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라면 하이브리드 어법이라고 부르겠는가? 한본어는 각자 언어의 특정 단어나 문장을 빌리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죽박죽 섞여서 새로운 어법으로 전개된 것을 뜻한다. 한본어 현상은 한일 모두에서 관찰되지만, 일본에서 더 기세등등하다. 아무래도 ‘한국풍’이 세련되고 쿨한 젊은이의 문화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동사나 형용사 뒤에 ‘ニダ(니다)’라든가 ‘いんで(인데)’를 붙인 어법이 있다. ‘ニダ’는 한국어의 ‘~입니다’, ‘~합니다’, ‘いんで’는 한국어의 ‘~인데’, ‘~하는데’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어로 ‘다녀왔습니다’라는 뜻의 관용어 ‘ただいま(다다이마)’에 한국풍 어미인 ‘니다’를 붙여서 ‘타다이마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ウエー(왜)’, ‘ちんちゃ(진짜)’ 등의 한국어를 문장에 적절히 섞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한본어를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 예컨대 일본의 SNS에서는 한국어의 ‘귀엽다’와 일본어의 ‘가와이이’가 결합된 ‘キヨい(기요이)’라는 한본어를 접할 수 있다. 원래 ‘기요이(清い)’는 ‘청렴하다, 깨끗하다’는 뜻이지만, 한본어로는 ‘귀엽다’는 뜻이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어가 ‘묻은’ 말투가 다소 과장된 스타일로 귀여움을 연출하는 어법으로 받아들여진다. 한일 SNS 양쪽에서 종종 발견되는 ‘초멘나사이/ちょめんなさい’ 같은 표현도 재미있다. 한국어로 ‘처음’을 뜻하는 접두어 ‘초’와, ‘미안합니다’라는 뜻의 일본어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가 결합한 말인데, SNS에서 서로 팔로하지 않는 유저가 대뜸 ‘멘션’(코멘트)을 남길 때 ‘실례합니다’와 같은 뉘앙스로 등장한다. 물론 한본어는 현대 한국어, 혹은 현대 일본어의 표준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인터넷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두 언어가 뒤섞인 어법이 젊은이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소셜미디어에서 꽃피우는 현상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언어의 유연한 적응력

한국 사회에서 일본어는 식민지 시대의 강압적인 통치의 상징이었다. 해방 이후 줄곧 척결 대상으로 삼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는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여전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고통스러운 역사의 산물이기는 하나, 많은 한국인에게 일본어가 매우 낯선 존재는 아닌 것이다. 대조적으로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한국어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자이니치’(在日, 8·15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한국인과 북한 국적의 조선인을 아우르는 호칭)가 쓰는 소수의 언어에 불과했다. 2000년대 초 한류 열풍이 불기 전까지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인도 드물었다. 그렇게 보자면,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본어라는 언어유희를 즐긴다는 사실이 새삼 인상적이다.

한본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역시 21세기에 들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대중 문화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대중음악(케이팝), 드라마, 영화 등 대중적인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은 국경을 넘은 콘텐츠 소비를 손쉽게 만들었다. 이전보다 훨씬 쉽게,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외국어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인터넷도 한본어가 융성할 수 있는 절호의 조건을 제공했다. 인터넷에서는 실시간 번역이나 인공지능(AI)의 보조를 손쉽게 받을 수 있다. 외국어에 대한 친근감을 키울 수 있고, 국경을 넘은 커뮤니케이션도 비교적 수월하다. 소셜미디어가 한본어 같은 국제적인 언어유희를 폭넓게 확산시키는 본진 역할을 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두 언어가 융합하는 하이브리드 현상의 주요한 배경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내재적 유사성이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휘나 문법, 어순 등이 유사한 만큼 두 언어가 뒤섞여도 이질감이 크지 않은 만큼, 자연스러운 융합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일본어에는 문법적으로 이질적인 언어를 자연스럽게 흡수해 버린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어는 ‘표의문자’(의미 단위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한자에 더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라는 두 가지 표음문자(소리와 발음을 표기하는 문자 체계)를 함께 사용한다. 세 가지 문자를 혼용하는 언어 체계는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지만, 덕분에 다른 언어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발군의 적응력이 장점이다. 예를 들어 ‘무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ねぐる(네구루)’는 동일한 뜻인 영단어 ‘neglect’와 동사를 의미하는 어미 ‘る(루)’가 결합한 단어다. 문법적으로 이질적인 영단어의 일부를 떼어서 일본말로 흡수시켜 버린 것이다. ‘게으름 피우다’라는 뜻의 동사 ‘サボる(사보루)’는 노동자의 태업 행위를 뜻하는 프랑스어 ‘sabotage’에서 온 말이고,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다’라는 뜻의 동사 ‘バズる(바즈루)’는 비슷한 맥락의 영단어 ‘buzz’가 일본어 동사로 변신한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뒤섞이고 변하는 것은 모든 언어의 본질이기도 하다.

◇ 하이브리드 언어유희는 문화적 친밀감의 상징

한국어와 일본어가 자꾸 가까워지는 이런 현상을 불편하게 느끼는 한국의 기성세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젊은이들의 한국어에 대한 호감을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철없는 행동인 양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본어 현상은 한일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키워온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한일 간에 산적한 미해결 과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성세대가 반세기가 넘도록 풀지 못한 골치 아픈 문제들 때문에 모처럼 싹튼 문화적 친밀감에 찬물을 끼얹어서야 되겠는가?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믿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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