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도둑질 다음으로 잘한 게 글쓰기… 기자가 된 범죄자

2022.11.28 04:30
맨체스터 고턴(Gorton)은 잉글랜드 러스트 벨트(rust belt, 쇠락한 공업지역)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한 곳이다. 연간 최대 8,000여 대의 기관차를 생산하며 영국 철도산업을 이끌던 고턴은 1960년대 공장들이 잇달아 문을 닫으면서 빠르게 쇠락했다. 인구는 줄고 실업자가 늘어났고 상업시설들이 문을 닫고 주택가도 슬럼화했다. 가난과 알코올·마약 중독과 범죄가 늘어났다. 근년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되긴 했지만, 여전히 고턴은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통틀어 ‘반사회적 행동 명령(ASBOs)’ 즉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탈 행위에 대한 법원 판결이 가장 빈번한 곳으로 꼽힌다.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6남매가 겪는 노동자 가정의 어두운 일상을 푸근한 위트로 엮어 만 10년(2004~13)간 139편(시즌 11)이나 방영된 채널4의 블랙코미디 드라마 ‘셰임리스(Shameless)’의 주무대도 고턴이었다. 고턴이란 지명은 ‘Gore Town(피와 더러움의 도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 ‘감옥 통신원’ 에릭 앨리슨(Eric Allison, 1942.12.2~ 2022.11.2)의 고향이 고턴이었다. 거기서 나서 근 60년을 사기와 절도, 수표 위조 등을 일삼던 그는 감옥에 갇혀 지낸 만 16년과 도피 기간을 빼곤 평생 그 도시를 떠난 적이 없었다. 만 60세 때인 2003년 기자가 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고턴에 대한 애정을 그는 2005년 가디언에 이렇게 썼다. “이 도시는 내게, 불의와 쇠락한 지역 젊은이들을 악마화하는 사회에 대한 건강한 분노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감옥 통신원’은 언론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교정시설 내 실상, 즉 교도소 비리와 교도관 폭력, 교정 행정의 문제점 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1990년대 말 실험적으로 시도한 일종의 전문기자제도. 중학교도 못 마친 학력이었지만 앨리슨은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범죄 이력으로 영국 주요 교정시설을 두루 거친 ‘전문가’였고, 스스로 판단컨대 도둑질 다음으로 좋아하고 잘한 게 글쓰기였다. 무엇보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주눅 든 적 없는, ‘아마추어적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저널리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만 19년 감옥 통신원으로 일하며 가디언 편집진을 충분히 만족시켰고, 자신과 같은 ‘고터너(Gortoner)’ 즉 사회적 낙오자들 특히 교정시설 청소년과 여성들이 겪는 불의를 격렬히 고발했다. "모름지기 저널리스트는 ‘아늑한 무리(cosy club)’의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에릭 앨리슨이 전이 골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영국 법률 인권 잡지 ‘The Justice Gap’ 인터뷰에서 앨리슨은 “어려서부터 꽤나 반권위적이었다”고 말했다. 누가 뭘 시키면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 심한 말더듬과 사시 때문에 학교에서도 자주 놀림을 당해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질을 벌이곤 했다. 11살 때 친구들과 이웃집에 침입해 저금통을 훔쳤다가 경찰서에 끌려갔고, 14살 땐 풍선껌 자판기를 턴 혐의로 소년법원에서 3개월 형을 선고받고, 더비셔 포스턴홀(Foston Hall) 소년교도소에 처음 수감됐다. 그는 삼형제 중 막내였고, '소소한 범죄를 일삼으면서도 윤리적으로는 무척 엄격'했다는 아버지의 가업과 직업윤리를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12월이었어요.(…) 경찰관 두 명에게 이끌려 가시 철조망을 두른 거대하고 음침한 빅토리아풍 건물로 들어섰죠. 한 교도관이 이름을 물어 대답했더니 말끝마다 반드시 ‘Sir’를 붙이라고 하더군요. 긴장한 탓이었는지 그날따라 말더듬 증상이 심해 그 말이 잘 안 나왔어요. 교도관이 다가오더니 곧장 제 얼굴에 주먹을 날리더군요. 경찰관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런 식이었어요.” 잔뜩 겁을 먹은 그는 첫날밤 이불에 오줌을 쌌고, 다음날 오줌싸개들이 모인 방으로 이감됐다. 교도관들은 매 시간 아이들을 깨워 강제로 화장실에 가게 했다. 그는 “짧고 예리한 충격"이었다고, "우리에게 겁주려고 했던 거였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저항감을 북돋워 우리끼리 뭉치게 했죠. ‘다시는 지지 말자. 시스템이 우리를 짓밟도록 내버려두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는 거죠." 출소 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잠깐 식당 웨이터로 일한 기간을 빼면 그는 만 57세 되던 99년 출소할 때까지 범행- 도주- 체포- 재판- 입소- 출소를 거듭했고, 새로운 범행을 구상하기까지 사회에 잠시 머문 기간을 자칭 ‘안식년’이라 불렀다. 그의 전공은 절도와 문서 위조였다. 금은방을 털기도 했고, 여권과 지로 수표 위조도 했고, 96년 팀을 규합해 맨체스터 세인트 앤 광장의 바클레이 은행 지점 털이도 감행했다 그들은 금고를 열지 못해 위조수표 발행에 필요한 금융 정보와 창구의 현금-수표만 챙겨 나와야 했다. 시가 약 100만 파운드 규모였다는 그 은행털이로 그는 7년 형을 선고받아 3년 반 만인 99년 말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그의 마지막 전과였다.그는 자신이 치른 범죄의 대가를 두고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공정한 경찰의 공정한 직무’의 결과이자, 당연한 ‘직업적 위험(occupational hazard)’이기 때문이었다. “목수가 망치질을 하다 보면 손가락을 다치기도 하듯이, 범죄자도 실수를 하면 감옥에 가는 법이다. 그것 때문에 끙끙댄 적은 없다. 덜 붙잡혔다면 좋았겠지만, 더 자주 잡혔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교도소 내 가혹행위는 전혀 다른 문제였고, 성인 교도소라고 소년교도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교도관 6,7명이 한 사람을 진압봉으로 곤죽이 되도록 패는 장면을 본 적이 있고, 나도 그렇게 맞은 적이 있다. ‘이 놈들이 나를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말했다.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강력 범죄 경력도 없는 소위 ‘잡범’ 출신이었지만, 교도소에서 그를 얕보거나 괄시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상대가 누구든, 교도관이어도 참지 않았다. 주먹질엔 이력이 난 터여서 그도 더러 주먹을 썼지만, 그의 무기는 주로 글이었다. 문맹의 재소자들을 위해 가족이나 법관, 정치인 등에게 탄원서를 대신 써줬고, 동료들의 재판이나 소송에도 제 일처럼 나서곤 했다. 그는 교도관들의 골칫거리였고, 그래서 툭하면 징벌방(독방)을 오가야 했다. 교도관들이 그를 괴롭힌 방법은 폭행이나 징벌방을 빼고도 다양했다. 편지 뜯어보기, 가족 면회 전날 밤 다른 교도소로 이감시키는 일명 ‘winding-up(약 올리기) ' 등등. 그는 스트레인지웨이즈, 브릭스턴, 웜우드 스크럽스, 원즈워스, 더럼, 리즈, 버밍엄, 리버풀교소도 등을 전전했다. “나는 살인자들, IRA 테러리스트들, 강간범들, 사이코패스들과도 한 방에서 지내곤 했다. 그들끼리 저지르는 숱한 지독한 짓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내가 본 최악의 행위 스무 개를 꼽는다면 그 목록에 재소자가 저지른 짓은 단 한 건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최악의 감옥 폭동으로 꼽히는 맨체스터 스트레인지웨이즈(현 HMP 맨체스터) 교도소 폭동이 1990년 4월 시작됐다. 교도관들의 상습 폭행 등 인권 유린을 견디다 못한 재소자들이 교도관들을 제압, 만 25일간 수용동을 장악한 채 감옥 지붕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 폭동과 진압 과정에서 재소자 한 명이 숨졌고 교도관 147명과 수감자 47명이 다쳤다. 당시 ‘안식년’ 중이던 앨리슨은 곧장 교도소 앞으로 달려가 인근 도로에서 메가폰을 들고 옛 동료인 재소자들을 응원-선동하며 사태가 진압되던 날까지 교도 행정을 비판했다. 그가 기자와 저널리즘의 힘과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도, 가디언이 ‘감옥 통신원’이란 제도를 구상하게 된 것도 그 폭동 덕이었다. 스트레인지웨이즈는 앨리슨에게도 각별한 곳이었다. 논스톱 최장 기간인 4년 6개월(68~73년)을 보낸 곳이 거기였고, 고등법원 판사의 보석 영장을 위조해 탈옥을 시도했던 것도 거기였다. 그는 4년 뒤인 94년 탐사 저널리스트 니키 제이미슨(Nicki Jameson)과 함께 스트레인지웨이즈의 실상을 기록한 논픽션 ‘1990년 스트레인지웨이즈: 심각한 소요(A Serious Disturbance, 1994)’를 출간했다. 2년여 뒤 은행털이 직후 그가 수감된 곳도 스트레인지웨이즈였다. 2003년 그는 가디언 통신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조건, 즉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그에겐 무척 많았고, 또 어머니의 편지를 훔쳐 읽던 유년시절부터 간직해온 글쓰기의 열망도 있었다. 당시 가디언에는 살인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감돼 있던 감옥 통신원 어윈 제임스(Erwin James, 1957~, 2004년 가석방)가 활동 중이었다. 당연히 앨리슨도 제임스의 칼럼 애독자였다. 이력서와 함께 낸 500자 분량의 에세이로 앨리슨은 제2호 ‘감옥 통신원’이 됐다. 면접을 통해 그를 채용한 당시 편집장 앨런 러스브리저(Alan Rusbridger)는 “불의에 맞서려는 그의 열정과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고, “만일 채용되면 반듯한 삶을 살겠다고 한 약속을 신뢰했다”고 말했다. 범죄자 시절부터 앨리슨을 알던 '옵서버' 전 편집자 크리스 보피(Chris Boffey)는 그의 채용 여부에 대해 의견을 물은 가디언 편집장에게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대신 나라면 그의 비용 청구서는 두 번 살펴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앨리슨은 ‘첫 직업에 비해 벌이가 너무 시원찮다’며 자주 불평하긴 했어도, 자신의 모든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제임스가 주로 칼럼('A Life Inside')을 쓴 반면, 앨리슨은 재소자 인터뷰 등 화제성 기사와 스트레이트, 심층취재 기사도 두루 썼다. 그도 전문가였지만, 그를 신뢰하는 수많은 제보자와 열정적 취재원들이 그에게 있었다.그는 임신한 여성 재소자를 ‘땀통(sweat boxes, 주로 고문용-징벌용으로 쓰이는 작은 나무상자)’에 가둬 이감시키는 교도 관행을 폭로함으로써 그 관행을 없애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07년에는 가디언 기자 사이먼 해튼스톤(Simon Hattenstone)과 함께 수감 중 가혹행위를 당한 뒤 자살한 14세 소년(Adam Rickwood)의 죽음의 진상을 취재해 폭로했고, 청소년 교정시설 ‘메드웨이보안훈련센터’의 아동 학대 실상을 까발려 정부로 하여금 거대 민간 위탁 보안업체(‘G4S’)와의 청소년 교도소 운영계약 일체를 철회하도록 했다. 2011년에는 매덤슬리(Medomsley) 교도소 내 여성 재소자에 대한 성폭력 실태를 보도, 영국 행형기관 운영 실태에 대한 단일 최대 조사작업‘(Operation Seabrook)’을 이끌어냈다. 조사 과정에서 매덤슬리에 수감됐다가 피해를 입은 1,600여 명이 스스로 나서 증언한 그 사건과 보도로, 앨리슨과 해튼스톤은 2013년 국제사면위원회 탐사보도 미디어 상을 수상했다. 해튼스톤은 “거의 모든 사연들은 에릭과 그의 명민한 취재원들을 통해 취재됐다”고 밝혔다. 앨리슨은 1981년 결혼해 두 딸 케리(Kerry)와 캐롤라인(Caroline)을 낳았지만, 가족과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었다. 해튼스톤은 “(그렇긴 해도) 그의 딸들은 평범한 가정의 또래들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보다 더 끈끈하다고 여겼다”며 앨리슨의 자상한 면모를 부각했지만, 둘째 캐롤라인이 10대 시절 앨리슨에게 ‘이기적인 개자식(selfish bastard)’이라 써 보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훗날 별거했지만 이혼하진 않았고, 여느 가족처럼 자주 사이좋게 어울렸다. ‘아버지 뭐 하시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늘 ‘도둑놈’이라고 대답하곤 했다는 큰 딸 케리가 대학에 진학한 무렵부터는 “우리 아버지 가디언 기자”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 걸 그는 무척 뿌듯해 했다. 원고료(에세이 기준 편당 90파운드)가 너무 짜다고 했다는 그의 푸념은 농담이었거나 가디언 측이 미안해서 눙친 말일지 모른다. 그는 “장난치냐? 감옥에서 나는 교도관에게 거슬리는 말 한 마디 했다고 징벌방에 갇히곤 했는데, 지금은 내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돈을 받지 않는가.(…) 만일 가디언이 내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면, 한치 의심 없이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도 거기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 편집장 러스브리저는 “에릭이 일류 은행강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저널리스트로서는 수준급이었다. 언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한 그의 불굴의 취재력을 잃은 건 크나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친구처럼 지낸 해튼스톤은 “(화려한 범죄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윤리적인 사람이었다.(…) 불의를 보면 그는, 법적 해법이 너무 까다롭거나 편집진이 우리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한 달 아니 몇 년이 걸리더라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만 67세 되던 2013년 탐사저널리스트 브루스 케네디 존스(Bruce Kennedy Jones)와 함께 한 전과자의 출옥 후 복수극을 담은 ‘The Last Straight Face’란 소설을 썼고, 영국 수감자 인권 법률 지원단체 ‘PAS(Prisoners’ Advice Service)’ 이사로도 활약했다. 그는 고턴의 한 공공임대주택에서 유기견 두 마리와 함께 지냈고, 암 투병 중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해 그 집에서 주로 딸들과 개들과 어울리며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임종 투병기와 자서전을 쓰고 싶어했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앞의 꿈은 두툼한 원고로 남았고, 마지막 꿈은 이루지 못했다. 영국 형사 사법 정의 인권 관련 180여 개 비영리단체 연대기구인 '형사사법연대(CJA)'는 고인이 된 그에게 'CJA 언론상'을 헌정했다.
2003년 대구에 처음 발을 디딘 뒤 한국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꿈을 꾼 지 어느덧 20년. 한국에 첫발을 디딜 때 스물넷이었던 그는 경남 창원시에 정착, 어느덧 17년 차 직장인이자 세 아들의 아빠가 됐다. 그는 현대위아 직원이자 마라토너로 살면서 모국에서 끝내지 못한 대학 공부를 한국에서 마무리한 뒤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차례로 마쳤다. 아프리카 내륙에 위치한 부룬디에서 2010년 귀화한 김창원(45)씨 얘기다. 21일 경남 창원시 현대위아 본사에서 만난 김창원씨는 "최근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첫 입국 때만 해도 모든 게 불안했지만 이젠 직장, 가정, 학업, 취미생활(마라톤) 등에서 꽤나 많은 걸 이룬 셈이다. 김씨는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 가족과 직장 동료, 동호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며 "특히 부룬디에서 나만 바라보고 한국에 와서, 마라톤하는 것까지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김씨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마라톤이었다. 200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 하프마라톤 출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뒤 난민 신청을 하면서다. 15세 때던 1993년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소년 부징고 도나티엔(Buzingo Donatien·김창원씨의 부룬디 이름)은 전쟁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삶을 피하기 위해 한국 정착을 택했다. 그는 난민 신분으로 굵직한 대회서 풀코스를 제패하기 시작했다. 따져보니 '마라톤 좀 뛰어본' 한국인들의 존재 덕분이다. 김씨는 "나는 풀코스를 뛰던 선수가 아니었다"며 "한국 동호인들과 마라톤을 하다 보니 '서브스리(풀코스를 세 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일)' 해 봤느냐는 질문이 첫 인사일 정도로 마라톤에 진심이라 나도 덩달아 풀코스를 뛰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김씨의 최고 기록은 2007년 기록한 2시간18분39초. 이는 지난해 도쿄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나섰던 귀화 선수 오주한(도쿄올림픽 레이스 중 중도 포기)이 올해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기록 2시간18분07초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일보 주최 철원DMZ국제평화마라톤에서도 2010년과 2011년, 2016년 우승했다. 김씨는 "마라톤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뛰고 싶다"고 했다. 2005년 마라톤 동호인 추천으로 지원한 현대위아에 입사한 그는 누구보다 바쁜 청년기를 보냈다. 부룬디 명문 부룬디 국립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던 그는 경남대에 편입해 학사를 마친 뒤 직장 생활을 병행해 가며 학위 과정까지 끝냈다. 아침에는 마라톤, 낮에는 근무, 밤에는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웠다. 이젠 세 아들의 가장이다. 현대위아 차량부품생산관리팀에서 통관 업무를 맡고 있는 김씨는 "첫째가 8세, 둘째가 6세고, 최근에 태어난 아이까지 아들만 3명이 됐다"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피부색이 다른 데서 오는 편견이나 차별들이 걱정되지만, 학교와 이웃들이 잘 챙겨줘 고맙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람은 다 똑같고 누구나 친해질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경남대에서 쓴 석사 논문은 '아프리카의 품질경영 발전을 위한 품질명장제도 도입 방안에 관한 연구', 박사 논문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품질교육시스템 설계에 관한 연구'다. 아프리카 산업의 미래를 생각한 주제다. 김씨는 "아직까지 아프리카가 한국에 비해서 부족한 게 너무 많다"며 "리더십 문제도 있고, 경쟁 체제도 없으니 발전 또한 더디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당장은 내 가족과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면서도 "비록 먼 미래가 되더라도, 한국에서의 학업과 직무 경험이 아프리카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