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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에서의 공식과 비공식

입력
2024.03.23 04:30
수정
2024.03.23 10:37
27면
0 0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중국 가는 사신을 조천사(朝天使)라 불렀다. 천자에게 인사드리러 간다는 사대의식이 깃든 말이다. 그것은 명나라 때이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연행사(燕行使)로 바뀌었다. '연경(북경) 가는 사신'이라는 건조한 의미의 이 말은 청을 '오랑캐 나라'로 낮춰 보는 관례에 따랐다. 일본 가는 사신은 통신사(通信使)라 했다. 그쪽 사정이나 좀 알아보러 간다는 수준의 용어이다. 사신의 신분도 달랐다. 조천사의 정사가 2품 이상인데, 통신사는 3품이었다. 사대와 교린 사이에 엄연히 다른 품계가 적용되었다.

격식을 차린다는 것은 예의와 직결된다. 이는 외교에서 더 첨예한 법인데, 나라 꼴이 잘 유지되던 시대일수록 엄정했으니, 거꾸로 보면 엄정했기에 관계 또한 잘 유지되는 것이고, 그 결과가 나라에 이익을 주었다. 외교는 그런 척도이다. 중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시절의 배경에는 외교에 능숙했던 이들의 수고가 숨어 있다. 우리가 처한 반도의 지정학적 사정이 마찬가지이니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겠다.

그런데 외교는 이런 프로토콜에 국한하지 않는다. 긴하고 중한 정보는 도리어 낮은 자리에서 비공식으로 교유되기도 한다. '열하일기'(1780)는 중국 기행문의 백미이지만, 저자 박지원은 정사인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신분이었다. 자제군관이란 잘나가는 집안 덕에 얻는 여행 한 자리였다. 비공식 수행원이다. '열하일기'에 필적하는 일본 기행문 '해유록'(1719)을 지은 신유한은 정8품 제술관에 불과했다. 미관말직이다. 그런데 그들이 쓴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사정은 당대 가장 뛰어난 정보였다. 공식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아 가능했다. 위에서는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에 벅찼지만, 한눈팔 틈 없는 그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눈치와 신경전뿐이다. 반면 박지원, 신유한 같은 자유롭고 낮은 자리의 인물의 글에는 살아 숨 쉬는 현장이 전해진다.

최근 정후교의 '부상기행'을 읽다 눈길이 멎었다. 신유한과 같은 때 자제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그는 신유한보다 더 일이 없었는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의 일본기행 16년 전인 1703년 벌어진 아코번(赤穗藩) 사무라이 47인 사건도 적어 넣었다. 이 사건은 일본식 의리를 설명하는 전형이고, 나중에 가부키의 최대 인기작 중 하나인 '주신쿠라(忠臣藏)'의 소재가 된다. 현지인 사이에서 입소문 나기 시작한 일을 정후교는 민첩하게 채록하고 있었다. 비공식이 거둔 짭짤한 성과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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