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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일의 결말

입력
2024.02.26 04:30
수정
2024.02.26 10:20
27면
0 0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고달산(高達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사찰.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고달산(高達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사찰.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보장왕 9년 조에 당대의 고승 보덕(普德)에 관한 짧은 기록이 보인다.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의 완주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대목이다.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연개소문이 건무왕을 죽이고 세웠는데, 언제 그같이 죽을지 모를 처지 속에 산 그는 전왕의 조카였다. 정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보덕의 기사는 짧지만 망해 가는 고구려의 복잡한 사정을 잘 담고 있다. 일찍이 연개소문은 도교를 키워 유교와 불교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백성의 교화'가 명분이었지만 다른 연유가 있었다. 당나라에서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정권을 제멋대로 하고 있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연개소문을 비판했다. 연개소문은 '사신을 당에 보내 도교를 보내 달라' 했다. 명분과 달리 실속은 그렇게 정치적이었다.

선한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고구려에 들어온 도교가 바른 역할을 했을 리 없다. 당나라에서 보낸 도사들이 나라 안의 이름난 산천을 다니며 주술을 걸어댔다. 기를 누르는 사술(邪術)이었다. 보덕이 떠난 배경이다. 같은 일을 다룬 삼국유사 기록에 오면 전후 사정이 좀 더 환하다. 보덕은 '그릇된 길이 바른 길과 맞서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고민'하여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포기하고 '신통스런 힘으로 거처를 날려' 떠나야 했다.

보덕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어지러운 세태를 피해 편한 곳으로 달아난 것이 아니었다. 끝내 충정이 통하지 않자 움직였다. 그런데 옮겨 간 방법이 충격적이다. 몸만 아니라 신통술로 거처를 통째 들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경복사에 있는 날아온 방장'이 흔적이라고 넌지시 증거를 댄다. 이 일이 있고 18년 뒤, 그것이 예언이라도 된 듯 고구려는 끝내 망하고 말았다. 일개 백성이라도 마찬가지겠으나, 보덕은 시대의 현자(賢者) 아닌가. 그런 그가 거처까지 몽땅 들고 가버렸다는데 결과야 뻔했다.

흔히 보덕의 이거(移居)를 고구려 멸망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바로 앞에 나오는 '노루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그 뒤를 이리떼가 따랐다' 같은 기록이 상징이다. 상징 아닌 현실이 고구려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호소해도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아 떠나는 발걸음이었다. 상징을 쓰지 않고도 명확히 설명되는 현실을 비극이라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무엇인가.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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