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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비만 방만한 것이 아니다

입력
2023.08.28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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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
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방만 연구개발에 제동 건 윤석열 정부
국회, 공복의식 없는 의원들의 카르텔
세금 낭비를 막은 프록스마이어 의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윌리엄 프록스마이어 상원의원(왼쪽). 백악관 제공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윌리엄 프록스마이어 상원의원(왼쪽). 백악관 제공

윌리엄 프록스마이어(1915~2005)라는 미국 상원의원이 있었다. 위스콘신 출신 민주당원으로 1957년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5회에 걸쳐 연임, 1989년 초까지 31년 4개월 동안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청렴하고 근면한 정치인이었다. 세금을 낭비하는 방만하고 불필요한 정부 사업과 터무니없는 연구개발비 지출을 폭로해서 유명해졌다. '상원의 불독(감시견)'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상원 건물에 의원 헬스장을 만드는 데 반대하고 자신은 조깅을 해서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상원 세출위원회 위원으로서 프록스마이어는 방만한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그 대신 소비자를 보호하고 낙농가를 지원하는 예산을 늘렸다. 납세자의 돈을 귀하게 여긴 그는 인기가 높아서 선거자금을 모으지 않고도, 압도적 지지로 선거에서 승리하는 기록을 세웠다. 프록스마이어는 닉슨 행정부가 추진한 초음속여객기(SST) 개발에 대해, 불필요한 사업이라면서 예산 삭감을 주장해서 SST를 좌초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록스마이어는 그가 조사한 세금낭비 프로젝트에 골든플리스상(償)을 수여해서 화제가 됐다.

8만4,000달러를 투입해서 사람이 사랑하는 이유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발주한 국가과학재단은 1975년 최초로 이 상을 받았다. 400만 달러를 투입해서 편지 쓰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미국 우정청, 죄수들이 탈옥하려는 이유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발주한 법무부, 중남미 국가의 윤락가를 연구하는데 9만7,000달러를 지출한 정신의학연구소 등이 이 상을 받는 불명예를 당했다. 정부가 지출을 늘려서 무슨 사업이든 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에 국민세금의 소중함을 일깨운 그의 정신은 존 매케인 같은 의원들에 의해 계승됐다.

1960년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윌리엄 프록스마이어가 자신이 절약한 예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위스콘신 역사학회 제공.

1960년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윌리엄 프록스마이어가 자신이 절약한 예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위스콘신 역사학회 제공.

프록스마이어 의원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는 정부가 내년 주요 R&D 예산을 21조5,000억 원으로 책정해서 금년 대비 14% 줄였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는 진행 중인 R&D 사업도 전면 검토해서 108개 사업을 통폐합했다고 밝혔다. 방만하게 운영해온 연구개발 사업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각 부처가 대학과 연구기관에 적당하게 발주해 온 연구사업도 허술하고 불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해당 부처로 하여금 책임지고 삭감토록 하는 등 강도 높은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

국민세금으로 진행되는 방만한 사업은 R&D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새만금공항, 흑산도공항, 그리고 가덕도공항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냉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유럽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단거리 항공노선을 철폐하려고 하는데, 우리만 여기저기 공항을 건설하겠다고 하니 황당한 일이다. 전남 영암의 F1 경기장 등 지역발전을 내걸고 무리하게 건설한 시설들이 결국 실패하고만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구는 물론이고 경제규모도 피크를 지난 우리의 현실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자기 지역에 예산을 끌어오는 데만 신경을 쓰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자기들이 국민 전체의 공복(公僕)이라는 의식이 없다. 다른 지역 예산을 밀어주어야 자기 지역 예산도 다른 의원들이 밀어줄 것이라는 카르텔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우리 국회다. 의원들부터 국민세금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니 정부 공무원들에게 그런 자세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근래에는 국회의원 수준이 저하돼서 자신들이 속해 있는 상임위원회의 소관인 R&D 사업을 이해할 만한 지능과 식견이 있는 의원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음 총선에선 프록스마이어 의원 같은 사람을 한두 명이라도 여의도에 보내야 한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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