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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도, 순한 맛도 있는 다채로운 미역줄나무

입력
2023.07.31 04:00
수정
2023.07.31 09:2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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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무 올라타 위용 뽐내고
고산의 키가 작은 나무를 에워싸며 자라는,
알쏭달쏭 종잡을 수 없어 오묘한 식물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미역줄나무.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이다. 미역처럼 본줄기를 중심으로 사방팔방 자잘한 줄기와 너른 잎을 낸다.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동북 지방에 분포하며 주로 높은 산에 산다. 고산의 키가 작은 나무를 에워싸는 방식으로 한여름에 세력을 확장한다. 허태임 작가 제공

미역줄나무.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이다. 미역처럼 본줄기를 중심으로 사방팔방 자잘한 줄기와 너른 잎을 낸다.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동북 지방에 분포하며 주로 높은 산에 산다. 고산의 키가 작은 나무를 에워싸는 방식으로 한여름에 세력을 확장한다. 허태임 작가 제공

길을 잘못 들었다. 미역줄나무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 곰배령에서 점봉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길. 이곳은 탐방객 출입 통제구역이다. 인위적인 활동을 아예 차단해 산을 보호하겠다는 뜻에서다. 사람들 발길 끊긴 곳은 미역줄나무 차지다. 미역처럼 본줄기를 중심으로 사방팔방 자잘한 줄기와 너른 잎을 내는 덩굴나무. 항간에서는 잎이 보드라워서 미역줄나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한에서는 메역순나무라고 한다. 왔던 길을 되짚어서 미역줄나무 앞에 다시 선다. 한여름에 그 나무는 다른 나무와 나무들을 올라타 넘실대며 위용을 떨친다. 미역줄나무가 수북하게 우거지면 그래서 조붓한 길은 다 지워진다. 미역줄나무에 가로막혔다고 옆으로 돌아가면 산에서 길을 잃기 십상. 그 덤불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가려졌던 길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미역줄나무가 아무 데나 함부로 자라는 건 아니다. 해발고도 1,000m 정도는 돼야 뿌리를 내린다. 시인 정지용은 '백록담'이라는 시에서 “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고 썼다. 정말로 산정의 나무와 풀꽃은 키가 작다. 산꼭대기에서 특히 사나워지는 바람에 맞서느라 그렇다. 산허리에서 10m가 넘게 자라는 신갈나무가 산정에서는 2m가 채 안 되게 자란다. 중턱에서는 내 키를 훌쩍 넘는 진달래와 철쭉이 산의 맨 위에서는 내 허벅지에도 못 미친다. 능선에서 앙증맞게 자라는 그 나무들과 눈 맞추고 걷다가 아이고, 수풀이 이렇게나 우거졌네, 하는 순간을 마주했다면 그건 아마도 그들 나무를 뒤덮은 미역줄나무를 만난 경우일 거다. 고산의 키가 작은 나무를 에워싸는 방식으로 이 무렵 미역줄나무는 세력을 확장한다.

지금 내가 우거진 덤불을 헤치며 점봉산 정상을 향하는 이유는 봉우리에 가닿으려는 것이 아니다. 거기 사는 바람꽃을 만나기 위해서다. 바람꽃은 1,300m 이상의 고산에 사는 희귀 식물이다. 초복 무렵 꽃이 피기 시작해서 말복 즈음 진다. 남한에서는 설악산과 점봉산을 빼면 바람꽃이 스스로 자랄 수 있는 자생지는 없다. 왕복 20km 점봉산 산길을 걸어 바람꽃을 찾고 식물조사를 마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10시간. 사람이 만든 화장실은 산 어디에도 없다. 대소변을 보려면 자연에 신세를 져야 한다. 식물을 조사하러 다닌 지 10년이 넘으니 깊은 산속에서 용무를 보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 미역줄나무가 앞에 있으면 자신감이 더 붙는다. 일단 미역줄나무 덤불이 내 몸을 잘 가려주니까. ‘급똥’이 마려운 위급한 상황이 닥쳤다면 미역줄나무 품에 숨어서 급한 불을 끄면 된다. 그러고는 내 손바닥만 한 잎 몇 장을 뜯고 가지런히 겹쳐 모아 뒤처리하는 데 쓴다. 미역줄나무 잎은 미역 순처럼 보드라워서 그 용도로 제격이다. 일련의 과정은 대체로 신속하고 깔끔한 편이다.

미역줄나무의 꽃과 열매. 상아색 별 모양의 자잘한 꽃 수백 송이가 모여서 큼지막한 꽃차례를 이룬다. 씨앗에 날개가 달린 '시과'의 연붉은빛 열매는 마치 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sub-arboretum.ssl-lolipop.jp

미역줄나무의 꽃과 열매. 상아색 별 모양의 자잘한 꽃 수백 송이가 모여서 큼지막한 꽃차례를 이룬다. 씨앗에 날개가 달린 '시과'의 연붉은빛 열매는 마치 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sub-arboretum.ssl-lolipop.jp

길을 가로막아 애를 먹이다가도 돌연 나를 구하기도 하는 미역줄나무의 진짜 매력은 눈부신 꽃과 아름다운 열매다. 상아색 별 모양의 자잘한 꽃 수백 송이가 모여서 큼지막한 꽃차례를 이루며 초여름에 핀다. 초록 이파리 몇 장이 붙은 꽃대를 꺾어 모으기만 하면 근사한 꽃다발을 만들 수도 있다. 벌과 등에를 비롯한 여러 곤충이 화사하게 핀 꽃으로 모여든다. 꽃 속에서 꿀과 양분을 얻기 위해서다. 무더위가 사그라질 때쯤 꽃은 열매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씨앗 주변에 날개가 달리는 ‘시과’ 형태다. 날개는 석 장. 바람이 불면 열매에 붙은 그 세 장의 잎이 연붉은빛을 띤 채 깃털처럼 나부낀다. 멀리서 보면 꽃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없이 곱다.

미역줄나무는 국내를 벗어나면 일본과 중국 동북 지방에 산다. 동아시아의 전통 약재 식물이기도 하다. 염증과 자가 면역질환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썼다는 한방의 기록이 있다. 현대 의학은 암세포를 억제하는 능력을 높이 사는 것도 같다. 미역줄나무에서 추출한 프리스티메린(pristimerin)이라는 성분이 난소암세포의 생성을 억제하기 때문에 치료제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밖에도 면역 조절, 항염증 등을 포함하는 약리 활성을 가지고 있고 체중 감소, 인슐린 저항성 완화 등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의·약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도 경고한다. 간독성 및 신장 세포 독성과 관련된 50여 건의 중증 사례를 포함해 600건 이상의 부작용 사례가 알려지기도 했다. 약성이 있는 반면에 독성 또한 빈번하게 보고돼 상업적 활용에는 제한을 둔다고도.

그러고 보면 매운맛과 순한 맛을 다 지닌 알쏭달쏭 종잡을 수 없는 오묘한 식물이 미역줄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그 수풀을 뒤로한 채 정상의 바람꽃을 향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허태임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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