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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 제주 여신 '자청비'가 가져온 선물

입력
2023.06.20 20: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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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이주현푸드칼럼니스트·요리연구가

편집자주

음식을 만드는 것도 사람, 먹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우리 일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음식과 음식 이야기에 담긴 인문학적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낫토 메밀면. ⓒ이주현

낫토 메밀면. ⓒ이주현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이맘때면 우리 몸은 자연스럽게 열을 내려주는 시원한 음식을 찾게 된다.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이 '메밀면'이다. 살얼음이 동동 뜬 시원한 육수에 말아 먹으면 냉면과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고, 매콤한 양념에 비벼 수육 한 점에 돌돌 말아 먹으면 무더위에 잃어버린 입맛까지 찾아준다. 찬 성질을 지닌 메밀은 맛뿐만 아니라 영양학적으로도 무더운 여름에 딱 맞는 음식이다.

메밀 하면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 봉평부터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나라 메밀 최대 생산지는 사실 제주도이다. 제주의 메밀 재배 면적은 전국의 35%에 육박하며, 해마다 다르지만 절반에 가까운 양이 제주에서 생산된다. 그러니 메밀 하면 제주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제주도의 메밀을 언급할 때면 제주 농사의 신 '자청비' 역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 농경 신화인 '자청비 신화'는 '세경본풀이'에 등장한다. '세경'은 '농신'의 제주 방언이다. 세경본풀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승되는 농경 기원 신화이기도 하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자청비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거쳐 사랑을 쟁취하고 반란을 평정한 뒤에 농사의 신으로 거듭난다. 힘든 역경을 현명하게 뛰어넘을 만큼 주관 있고 강인한 여성이다. 신화에 따르면 훌륭한 업적을 세운 자청비에게 옥황상제가 오곡 씨앗을 선사한다. 자청비는 고향 제주로 내려와 씨앗을 심었는데 알고 보니 다섯 개 중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메밀이다. 자청비는 부랴부랴 하늘나라로 가서 다시 메밀 씨앗을 찾아온다. 자청비가 하늘에서 늦게 가져온 덕분일까. 사람들은 메밀을 다른 잡곡보다 늦게 파종하더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는 메밀을 1년에 두 번 수확한다. 4월에 뿌려 6월에 한 번 걷고, 8월에 뿌려 10월에 두 번째로 걷는다. 이처럼 메밀은 생육기간이 짧으며 강인한 생존력을 지녔기 때문에 과거 식량을 구하기 어려웠던 제주에서 구황작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곤궁한 시기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척박했던 제주에서 메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던 것이다. 마치 팝콘이 쏟아진 것처럼 새하얀 메밀꽃 물결이 출렁이는 제주에는 낭만적인 감성 뒤에 이처럼 치열했던 생존의 역사가 숨겨 있다.

메밀은 풍부한 영양성분 덕분에 '식탁 위 생약'이라는 애칭을 지니고 있다. 높은 함유량의 식이섬유와 단백질은 물론 다른 곡식보다 비타민B군과 8종의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메밀이 갈색을 띠는 것은 '루틴' 성분 때문인데, 혈압을 낮춰 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무더운 요즘, 가뜩이나 열이 많은 사람은 땀까지 많이 흘리면 탈수 증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때 먹으면 좋은 메밀면 요리로 '낫토 메밀면'이 있다. 찬 성질을 지닌 메밀과 수분이 가득한 채소를 풍성하게 넣어 무더위를 잡아준다. 여기에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한 낫토를 함께 곁들여 균형 잡힌 영양소를 자랑한다.

먼저 삶은 메밀면, 잘게 다진 낫토를 준비한다. 오이, 당근 등 각종 채소를 손질한다. 가장 중요한 메밀면 소스는 간장 2큰술, 와사비 1작은술. 레몬즙 0.5큰술, 올리고당(설탕) 1.5큰술, 올리브오일 3큰술, 참기름 1큰술을 넣어 잘 섞는다. 기호에 따라 소스를 조금씩 부어가며 나머지 재료를 잘 비벼준다. 마지막으로 김가루와 통깨를 듬뿍 뿌려주면 군침이 절로 넘어가는 비빔면이 뚝딱 완성된다. 상큼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사과, 배 등을 채 썰어서 넣어도 좋고, 다이어트 중이라면 식이섬유가 가득한 양배추나 양상추를 풍성하게 넣어도 좋다. 메밀면을 한 입 가득 넣고 있으면 입안에서 시원하게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의 식감이 담백하면서 통쾌하다. 다양한 보양식이 사랑받는 시기에 시원한 메밀 요리로 뜨거운 계절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나길 바란다.

이주현 푸드칼럼니스트·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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