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소련이 탄압한 아방가르드, 평화로 되살아난 저항의 예술

입력
2022.03.07 04:30
21면
0 0
한 시민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한 시민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1878년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난 말레비치는 193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눈감았다. 20세기 추상 미술의 선구자인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는 사후 60년이 지나서야 이뤄진다. 하얀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 하나를 그려놓고, 전통적 회화에 죽음을 선고한 말레비치는 말하자면 '화단의 혁명가'였다. 그가 주창한 절대주의는 추상 실험의 극치였다. 하지만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예술의 혁명'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되레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히고 만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가운데 20세기 초 소련에 의해 탄압받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다룬 전시에 관심이 쏠린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한창인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은 전쟁과 혁명이라는 시대와 사투를 벌인 일련의 예술가들을 재조명한다.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부엌(1915년 작)'.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부엌(1915년 작)'.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추소바야. 저녁(1928년 작)'. 혁명 이후 우달초바는 풍경화를 그리는 등 구상 회화로 회귀한다.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추소바야. 저녁(1928년 작)'. 혁명 이후 우달초바는 풍경화를 그리는 등 구상 회화로 회귀한다.

스탈린 치하 소련은 예술가들에겐 특히 엄혹했다. 이번 전시에 걸린 우달초바의 '부엌(1915년 작)'과 추소바야시의 자연을 그린 풍경화(1928년 작)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마치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듯 조각난 부엌의 풍경이 제멋대로 재조합된 '부엌'과 달리 '추소바야. 낮'과 '추소바야. 저녁'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이 자취를 감춘다. 실험미술가들에 대한 정권의 압박이 거세지자 구상회화로 돌아선 것이다.

우달초바의 남편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주요 작가 그룹인 '다이아몬드 잭' 일원이었던 드레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라트비아의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38년 체포돼 처형당했다. 하루아침에 '인민의 적'이 된 드레빈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우달초바는 남편의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속여 보관했다. 이번 전시에서 드레빈의 풍경화 '추소바야의 계곡(1928년 작)'을 볼 수 있는 건 그 덕이다.


두 어린이가 미술관 교육 전문기관 조이뮤지엄 에듀케이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에 걸린 칸딘스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두 어린이가 미술관 교육 전문기관 조이뮤지엄 에듀케이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에 걸린 칸딘스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칸딘스키는 일찍이 망명길에 올랐다. 186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혁명 이후 인민위원회에서 잠시 활동하다 1921년 독일로 떠난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이훈석 박사(러시아 미술사 전공)는 "예술은 정신적 활동이고, 예술은 예술로서 남아야 한다는 입장의 칸딘스키가 당시 (생산적 미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위미술을 퇴폐로 낙인찍던) 소련 미술계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며 "마침 독일 바우하우스 교수로 초청되자 망설임 없이 떠났고, 이후 스탈린 정권하의 고국 땅을 영영 밟지 못했다"고 했다. 독일로 간 칸딘스키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번 파리로 쫓겨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소련은 1934년 급기야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공식 미술 양식으로 선포한다. 모든 예술가는 소비에트 예술가 동맹에 가입해야 했고, 이들 작가들에게만 국가의 지원이 이뤄졌다. 작품 전시를 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수많은 예술가가 '반체제'로 몰렸다. 일부는 고국을 등졌고, 일부는 '전향'했다. 그렇게 명맥을 이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오늘날 20세기 현대미술과 건축,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술로 재평가받고 있다.

이번 전시 예술감독인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결국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정치와 혁명 그리고 전쟁의 시기에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에 부응하고 대처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예술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실패한 혁명'이 지금 다시 재조명되는 건 이들이 자유와 평등, 평화를 지향했기 때문"이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동시대 예술가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절대주의 창시자 말레비치는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리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암 투병 중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의 관을 짰다고 한다. 그가 영원히 잠든 관 뚜껑에는 검은 사각형과 원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까지 절대주의를 꺾지 않은 것이다. 예술은 죽지 않는다. 전시는 4월 17일까지.

권영은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