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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농인을 위한, 농인에 의한 사회

입력
2021.06.24 20: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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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이지선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워싱턴D.C.에는 1864년 설립된 갈로뎃대학(Gallaudet University)이라는 세계 최초의 농인 종합대학이 있다. 이 대학의 농학(Deaf Studies)이나 농교육학, 미국 수어학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그 외의 분야에서도 농인들의 지적 발달과 풍부한 문화 발전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모든 교직원, 교수와 학생은 미국 수어와 필담을 사용하며 30여 년 전부터는 총장도 농인이다. 갈로뎃대학 안에서는 미국 청인도 수어를 모르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처럼 여겨질 정도라고 한다. 당연히 강의도 수어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강의실 안에서 모든 학생들과 교수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강의실이 원형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벽 중간 중간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농인이 어느 공간 안에 있을 때, 누군가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고 또 멀리서도 수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만약 농인들만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될까? 캄캄한 곳에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서 이 대학은 엘리베이터도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갈로뎃대학은 학교의 설립 인가서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대학으로 그야말로 농인의, 농인을 위한, 농인에 의한 대학이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과 음향상을 받은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Sound of Metal)’에도 이러한 농인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된 드러머이다. 주인공이 찾아간 농인공동체에서도 여러 사람이 대화할 때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수어로 대화를 나눈다. 아직 수어를 모르는 주인공의 심정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영화 초반에는 수어 대사에 자막을 제공하지 않고, 종종 주인공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낮에 농(聾)아동들과 같이 수어를 배우지만 좀처럼 농인공동체에 어울리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한 농아동과 마치 드럼을 치는 것처럼 미끄럼틀을 두드리며 소리가 아닌 울림을 주고 받게 되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수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드디어 관객도 수어 대화의 자막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수어로 대화하면서 웃음도 되찾고, 아이들에게 드럼을 가르치기도 하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소리를 비로소 보고 느끼기 시작한다. (이후의 내용도 언급하고 싶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포스터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포스터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왜 농인들이 인공와우수술을 모두 환영하지는 않는 것인지 잠시 체험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속 농인공동체의 리더가 했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아도 돼” “청각장애는 잘못된 게 아니고 고칠 필요가 없다는 믿음, 그 믿음을 토대로 지어진 공동체야. 우리는 그 신뢰 위에 서 있어.” 나는 이 대사가 농(聾)문화가 과연 무엇이며, 왜 존재해왔고 존재해야 하는지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영화 속 농인공동체 입구에도 나오는데, 미국에는 노란색의 농아동 지역(Deaf Child Area) 도로 표지판이 있다. 이 지역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소리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고 있으니 청인 운전자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표지이다. 소리를 듣는 것만이 유일한 세계는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표지판이 있으면 좋겠다. 구별된 어떤 물리적 공간이 아니더라도 농인들만의 사회가 더욱 밖으로 드러나고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분리와 배척이 아닌, 소리를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 향유하는 농인의, 농인을 위한, 농인에 의한 독특한 농문화를 계속 발전시키길 바란다.

이지선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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