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울 대방동 서울공고에서 만난 김육훈 교사는 “일상에서 민주적 절차를 학습하고 인권이 부정되는 경험을 아무래도 적게 해서인지 기성 세대보다 학생들이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신뢰가 강한 편이라는 게 역사의식 조사 결과 파악됐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서 라디오를 통해 자국의 침략 행위를 비판한 일본 여성 하세가와 데루(1912~1947) 사례를 제시했다. 대다수 학생들은 하세가와를 지지했다. ‘전쟁은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인 만큼 하세가와 데루가 전쟁에 반대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란 대답을 고른 이들이 조사 때마다 절반을 넘었다. 평화와 인권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번엔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ㆍ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대동강 이남 땅을 영토로 확보한 걸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평화와 인권의 관점에서 제시된 답안 ‘삼국시대 내내 계속되던 전쟁이 줄어 보통 사람들이 부담을 덜었다’는 항목을 택한 이들은 고작 3~5%에 그쳤다. 전쟁에 ‘내 민족’ 개념이 들어가자 보편적 가치를 저버린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 함양’이란 목표가 역사 인식에 끼친 영향이다. 최근 역사교육연구소가 펴낸 ‘역사의식조사, 역사교육의 미래를 묻다’(휴머니스트)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엔 2010년부터 7년간 진행된 첫 전국 단위 학생 역사의식 조사가 담겼다.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알아내기 위한 조사다. 막연한 예단이나 상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구하기 위한 조사였던 만큼 참여한 학교와 학생 수만 273개교, 1만3,104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사였다.

15일 서울 대방동 서울공고 도서관에서 출간을 주도한 ‘역사의식조사, 역사교육의 미래를 묻다’를 소개하는 김육훈 교사. 배우한 기자

이 조사 연구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자 첫 조사 당시 역사교육연구소장이었던 김육훈(58) 서울공고 교사를 지난 15일 만났다.

김 교사는 보편적 가치 대신 지나치게 자기 민족의 희생만 강조하는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사에 담긴 자민족중심주의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논란이 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해도 그렇다. “위안부 피해자 분들은 ‘살아낸’ 사람입니다. 전쟁 폭력 속에서 살아낸 뒤 인권과 평화를 위해 여생을 바치는 여성 운동가로 보는 게 바람직하죠. 하지만 대부분 민족주의 서사로 소비됩니다. 일제에 의해 희생된 가녀리고 어린 조선 여성으로 말이죠. 이건 앞으로 교육 현장에서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김 교사는 “상대화를 유도하되 극단화는 차단하라”고 제안했다. ‘역사의 정치화’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다. 그렇기에 저마다의 경험과 세계관 등에 따라 역사는 달라지고 재구성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게 역사 교육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역사의 상대화가 ‘그래서 아무 생각이나 다 해도 된다’는 역사의 극단화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 김 교사는 ‘일베’나 ‘반일 종족주의’류의 주장을 거론하면서 “아무리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의 세계’가 존재하고 ‘전쟁은 안 된다’ 같은 보편적 가치가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론은 ‘역사 리터러시(문해력)’ 강화다. 김 교사는 이를 위해 “교실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을 제안했다. 학교 밖 실제 논쟁을 교실 안으로 과감히 끌어들이는 것이다. 김 교사는 “학습과 토론의 경험이 있어야 잘못된 주장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사의 바람은 민간에서 어렵게 이어지던 이 연구를 정부가 이어받았으면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역사 갈등은 늘 뜨거운 문제인 만큼, 국가 주도로 학생들의 역사의식 실태를 파악하고 역사 교육 방향을 가늠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추진됐으면 합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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