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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보다 센 ‘동양 혐오’ 바이러스 뿌리엔 인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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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보다 센 ‘동양 혐오’ 바이러스 뿌리엔 인삼도 있다

입력
2020.02.21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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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예수회 선교사가 인삼을 사람에 비유해 그린 삽화. 서양사람들은 중국인이 인삼에 부여한 초자연성, 신성한 믿음, 영생에 대한 헛된 갈망을 이렇게 비꼬는 방식으로 ‘중국의 전근대성’을 부각시켰다. 보스턴칼리지도서관 소장ㆍ휴머니스트 제공
유럽 예수회 선교사가 인삼을 사람에 비유해 그린 삽화. 서양사람들은 중국인이 인삼에 부여한 초자연성, 신성한 믿음, 영생에 대한 헛된 갈망을 이렇게 비꼬는 방식으로 ‘중국의 전근대성’을 부각시켰다. 보스턴칼리지도서관 소장ㆍ휴머니스트 제공

“네발 달린 것 중엔 책상, 하늘을 나는 것 중엔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매개체 야생동물, 특히 박쥐가 지목되자 중국의 ‘기괴한’ 음식문화에 또 한번 뭇매가 쏟아졌다. 한 중국 여성 여행 블로거가 ‘박쥐 수프’를 시식하는 동영상은 서구 언론의 입맛에 딱 맞는, 맛난 먹을거리였다. 나중에 이 영상은 중국이 아니라 2016년 남태평양 팔라우 제도에서 찍힌 것으로 밝혀졌지만, 중국 혐오는 이미 널리 퍼진 뒤였다. 발생원인, 감염경로 등 아직 명확히 규명된 게 없는 바이러스지만 이미 서구 세계는 중국, 더 나아가 동양에 대한 일방적인 멸시와 비난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거, 이미 오래된 얘기다. “서양이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뒤로 중국 문화, 특히 음식에 대한 편견과 배제는 늘 있어왔죠. 대표적으로 인삼은 동양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주는 메타포였어요.”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그랜드투어, 온천, 관상학 등 기발한 주제로 매혹적인 역사서를 써온 설 교수가 이번엔 인삼을 파고들어 ‘인삼의 세계사’를 써냈다.

인삼의 역사를 지구적 규모로 복원해내는 건 처음이다 보니, 미국의 인삼 주요 재배지 등 인삼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다 쫓아 다녔다. 그렇게 찾고 정리하는데 들인 시간만 7년인 노작이다.

16세기 유럽 약국의 모습.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각종 진귀한 약재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약재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 그 중 인삼은 가장 각광받던 약재였다. 출처 사이언스 포토 라이브러리ㆍ제공 휴머니스트
16세기 유럽 약국의 모습.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각종 진귀한 약재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약재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 그 중 인삼은 가장 각광받던 약재였다. 출처 사이언스 포토 라이브러리ㆍ제공 휴머니스트

왜 하필 인삼이었을까. 설 교수는 1995년 미국의 건강보조제 매장에서 ‘아메리칸 진생(American ginseng)’을 발견했던 얘기를 들려줬다. “인삼은 그저 한국 고유의 특산물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원산지를 보니까 미국 인삼이더라고요. 서양 역사책에서 인삼에 관한 이야기는 접해보질 못했는데 말이죠. 인삼은 왜 서양 역사책에서 그간 사라졌을까, 의문을 품게 됐죠.”

서양 기록에 ‘인삼’이 처음 등장한 건 1617년 일본 주재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이 보낸 통신문이다. “가장 귀한 약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에 충분하다”는 설명이 달려 있는 인삼과 유럽은 곧 사랑에 빠졌다.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인삼 찬양에 나섰고,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도 진상됐다.

인삼은 미국에게 ‘경제적 독립’을 가져다 준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776년 영국에서 정치적 독립을 선언한 미국에겐 딱히 경쟁력이 있을 만한, 색다른 상품이 없었다. 그 때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인삼을, 유럽을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거래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세계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의 뿌리를 찾아보면, 미국 최초의 ‘수출 효자상품’ 인삼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뒤 인삼은 서구 역사에서 사라진다. 유럽에서 시작된 ‘약전(藥典) 개혁’이 직격탄이었다. 그 당시 서양 의학계는, 지금은 각광받는 인삼의 핵심성분 ‘사포닌’을 추출해내는 데 실패했다. 그때부터 인삼에게 ‘의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약초’란 꼬리표가 붙는다.

다섯 명의 심마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국 다큐멘터리 ‘애팔래치아의 무법자들’. 미국의 인삼 역사를 다뤘으나 이 프로그램 역시 심마니들에게 반문명적이란 이미지를 덧씌운다. 출처 히스토리채널ㆍ제공 휴머니스트.
다섯 명의 심마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국 다큐멘터리 ‘애팔래치아의 무법자들’. 미국의 인삼 역사를 다뤘으나 이 프로그램 역시 심마니들에게 반문명적이란 이미지를 덧씌운다. 출처 히스토리채널ㆍ제공 휴머니스트.

이후 서양은 인삼을 ‘동양의 전유물’로 낙인찍고 융단폭격을 가한다. ‘중국과 아시아가 인삼에 그렇게 목맨 건 약초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낙후된 의약 시스템 때문’이라 비꼬거나 ‘더 많은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민초들을 혹사시키는 방탕한 지배계급의 잔혹함을 고발한다’고까지 했다.

중국의 음식문화는 이 때도 도마에 올랐다. ‘이상한 재료를 동원해 무한정한 식탐을 채우는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먹는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서구의 인삼 배척은 자신들 내부에서도 벌어졌다. 미국 내 인삼 재배지에서 일하는 백인 심마니들에게도 ‘반문명적 야만인’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설 교수는 동양을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 가공 기술 부족으로 인한 열등감,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인삼의 세계체제’를 부정하고팠던 서구인들이 결국 서양사에서 인삼을 지워버렸다고 본다.


 인삼의 세계사 

 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ㆍ464쪽ㆍ2만5,000원 

“인삼을 서양사에서 사라지게 만든 ‘문화적 구분짓기’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객관적인 과학의 영역에서도 발생할뿐더러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설 교수의 이 말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동양 혐오 바이러스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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