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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과 함께 은방울꽃이 온다

입력
2023.04.24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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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도, 연예인도 사랑한 우아한 은방울꽃
한반도에서 자라는 종은 기품 뽐내
‘행복을 다시 가져다 준다’는 꽃말도 지녀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한반도 내륙 산지에 널리 자라는 은방울꽃. 방울을 닮은 난초라는 뜻에서 한자로는 영란(鈴蘭)이라 하고 처마 끝에 다는 풍경에 비유하여 풍경란(風磬蘭)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한반도 내륙 산지에 널리 자라는 은방울꽃. 방울을 닮은 난초라는 뜻에서 한자로는 영란(鈴蘭)이라 하고 처마 끝에 다는 풍경에 비유하여 풍경란(風磬蘭)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유럽은방울꽃은 세계적인 명품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생전에 지독하게 사랑했던 식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원에 핀 유럽은방울꽃 향기에 매료되어 1950년대 향수를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표현한 향’이라고 표현했다. 그 제품은 지금도 향수업계에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다. 국내에서는 유명 여자 연예인들의 결혼식 부케로 알려지며 유럽은방울꽃이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외국 몇몇 기업에 의존해 수입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고가로 거래된다고 들었다.

지구에는 세 종류의 은방울꽃이 산다. 한반도를 비롯해 동아시아에 사는 은방울꽃, 유라시아 드넓은 대륙에 사는 유럽은방울꽃, 북아메리카 남부 애팔래치아 산맥에 고립된 채 사는 북미은방울꽃. 셋 다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아주 먼 과거에는 하나였을 것이나, 각자 저마다의 대륙에서 그 환경에 맞게 적응해 살면서 지금의 세 종으로 분화했을 것이다. 그 근거로 베링해협을 든다. 지금은 시베리아 동부와 알래스카가 바다에 의해 서로 다른 대륙이 되었지만 빙하로 해수면이 낮았던 신생대 후기에는 그 해협이 연결된 땅(툰드라 지대)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 대륙에서 다 같이 살던 은방울꽃이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대륙이 나뉘자 각자의 땅에 격리된 채 살게 되고, 오랜 시간 저마다의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과거의 동일한 종에서 별개의 종으로 구분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날 북반구에 드넓게 퍼져 살게 된 세 종의 은방울꽃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에 산다. 내륙의 웬만한 산에는 다 사는 편이다. 하지만 비교적 깊은 숲의 나무 그늘에서 땅에 낮게 깔리듯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기 때문에 눈높이를 그들에게 맞추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운 좋게 꽃을 포착했다면 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자칫 심장이 멎을 수도 있다. 그만큼 은방울꽃은 너무너무 예쁘니까!

은방울꽃. 게티 이미지뱅크

은방울꽃. 게티 이미지뱅크

전국의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는 자생식물을 만나고 다니면서 나는 은방울꽃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외모의 화려함보다는 자연의 순리대로 자란 원종의 우아한 자태, 수입산 재배식물 못지않은 우리 식물의 기품. 이것들을 제대로 알려준 게 바로 우리 땅에 자라는 은방울꽃이다.

초록색 가지런히 놓인 두 장의 잎사귀 사이에 꽃대가 쏘옥 하고 올라와서는 새하얀 방울 여러 개가 조롱조롱 모여 달린 그 꽃을 보면 이름 참 잘 지었구나 싶다. 방울을 닮은 난초라는 뜻에서 한자로는 영란(鈴蘭)이라 하고 처마 끝에 다는 풍경에 비유하여 풍경란(風磬蘭)이라는 이름도 있다.

우리 할머니는 향수란(香水蘭)이라고 불렀다. 산이 한창 신록을 뒤집어쓰는 5월에 할머니는 나를 동네 뒷산으로 자주 데리고 다녔다. 선산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봉분을 다듬다가도 주변에 핀 꽃들을 가리키며 할머니는 내게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돌아보면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 그이만의 애칭이었던 것 같다. 꽃내가 얼마나 짙은지 와서 한번 맡아보라고 꽃자리를 짚던 할머니의 손 너머에는 은방울꽃이 피어 있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 포스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 포스터

이십대 후반이던가. 끝을 알 수 없는 우울과 불안이 불쑥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덴마크 영화 '멜랑콜리아'를 만났다. 생각해 보면 영화 포스터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은방울꽃이 그 포스터 안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비정상적인 행동을 끊지 못하는 여주인공과 그를 보살피는 언니를 중심으로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거대한 행성이 지구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이 교차하며 펼쳐지는 판타지 형식이다. ‘재난이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내면일까, 외면일까’와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그 당시 혼란스럽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게 보낸 은방울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방울꽃에는 ‘행복을 다시 가져다 준다’는 꽃말이 있다. 유럽은방울꽃이 피기 시작하는 5월 1일에 행운의 증표로 그 꽃을 선물하는 문화가 프랑스에서는 16세기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독일 화가 프란츠 자베르 빈터할터(1805~1873)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을 위해 아서 왕자의 첫 생일인 1851년 5월 1일을 기념하여 그린 초상화에도 유럽은방울꽃은 등장한다. 마치 아기 예수처럼 표현된 어린 왕자가 그 꽃을 들고 있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5월을 여는 노동절에 거리마다 유럽은방울꽃을 주고받는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만국의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되새기는 5월을 앞두고 한반도 곳곳에도 은방울꽃이 서둘러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숭고한 노동에 행운이 깃들기를 희망하는 꽃들의 응원이 들리는 것만 같다. "Happy May Day!”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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