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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에 날아간 '코리안드림'… 혈흔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입력
2023.03.13 04:30
수정
2023.03.13 06:18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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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살인 누명 사건]
코리안드림 품고 한국 건너와 IT 업체 취직
함깨 거주한 사촌형 정신질환에 살해 위협
구사일생 살아남았지만 살인범 누명 구속
구치소 갇혀 결혼식 못 가고 해고까지 '악몽'
검찰, 국과수 부검·혈흔 감정서로 '자살' 결론
檢 도움으로 경제적 지원 받아 '새 출발' 각오

편집자주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건의 이면과 뒷얘기를 '사건 플러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1월 7일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가 경기 용인 소재 편의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 무스타파씨는 사촌형에게 흉기에 찔린 피해자였지만, 살인 혐의로 23일간 유치장과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월 7일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가 경기 용인 소재 편의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 무스타파씨는 사촌형에게 흉기에 찔린 피해자였지만, 살인 혐의로 23일간 유치장과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지금도 귀에서 맴돌아요. 넌 살인자라고.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는 그날 이후 '안 좋은 습관'이 생겼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자신이 있는 곳이 구치소가 아니라 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항상 주위를 둘러본다. 피칠갑을 한 자신을 향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비난은 매일 무스타파씨의 꿈에 찾아오는 손님들이다.

무스타파씨는 "고국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예정된 날, 살인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서 날밤을 새는 기분을 아느냐"며 "살인 혐의를 벗고 구치소에서 나오자, 연락이 두절돼 충격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입원 소식과 직장에서의 해고 소식이 전달됐다"고 말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던 무스타파씨를 살인자로 만들었던 그날, 도대체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코리안드림 품고 온 우즈베키스탄 사촌형제

무스타파씨는 유학생 신분으로 입국한 2018년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경기도 소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지난해부터 IT업체에 취업해 게임 개발자로 근무했다. 매달 400만 원가량의 월급을 받았고, 우즈베키스탄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면서 코리안드림은 현실이 돼가고 있었다. 1월 24일에는 고국에 있는 연인과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회사에서 휴가까지 받았던 터라, 무스타파씨에겐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하지만 그에게 코리안드림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꿈이었던 것 같다. 고국에 돌아가기 불과 2주 전인 1월 7일 일상을 무너뜨리고 삶을 파괴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스타파씨는 지난해 9월부터 사촌형 압둘로흐(가명·28)씨와 함께 반지하 방에 살고 있었다. 압둘로흐씨 역시 한국에서 성공한 동생의 모습을 보고, 그를 따라 IT 개발자가 되려고 한국행을 택했다. 무스타파씨는 사촌형의 정착을 돕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집을 내주고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등 물심양면 도왔다.

그러나 압둘로흐씨에겐 가족들만 알고 있던 비밀이 있었다. 그는 고국에 있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특히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처방과 진료를 전혀 받지 않아 증세가 나날이 악화됐다. 무스타파씨는 사촌형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건 발생 직전에 알게 됐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가 흉기에 찔린 상처. 무스타파씨는 정신질환을 겪던 사촌형 압둘로흐(가명·28)씨에게 뒤에서 칼에 찔렸다. 김영훈 기자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가 흉기에 찔린 상처. 무스타파씨는 정신질환을 겪던 사촌형 압둘로흐(가명·28)씨에게 뒤에서 칼에 찔렸다. 김영훈 기자


사촌형의 칼에 찔려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지만, 살인 혐의로 체포

사촌형과의 4개월 동거생활은 피가 튀는 결말로 끝났다. 1월 7일 평온했던 토요일 밤 10시 50분쯤, 무스타파씨가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던 순간 갑자기 커다란 손이 그의 눈을 가렸다. 난데없이 시야가 가려져 어리둥절하던 사이 무스타파씨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왔고, 통증은 이내 피로 분출됐다. 압둘로흐씨가 흉기로 무스타파씨의 목을 찌른 것이다. 쓰러진 무스타파씨에게 사촌형은 이번엔 정면에서 그를 찌르려고 했다. 무스타파씨는 피가 흥건한 방에서 사촌형과 몸싸움을 벌인 끝에 현관문을 박차고 탈출할 수 있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무스타파씨는 그제야 자신이 찔린 곳이 어딘지 살펴보기 위해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상처를 확인했다.

그는 반바지에 맨발 차림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거리를 활보하다가, 인근 편의점에 들어가 경찰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출동한 경찰은 무스타파씨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곧장 현장으로 향했고, 무스타파씨는 다음 날 새벽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받고 집중치료에 들어갔다.

병원에선 최소 6주간의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무스타파씨는 사흘간 병원에 머물 수 있었다. 무스타파씨는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촌형의 상태가 궁금했다. 매일 병원을 찾아온 경찰들에게 "사촌형을 체포했느냐"고 묻자, "잡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찰이 그에게 "사건 당시 입고 있던 반바지를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하자, 무스타파씨는 "뭐든 필요하면 다 가져가라"며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사건 발생 사흘 뒤인 1월 10일 경찰은 무스타파씨에게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며 그를 불렀다. 무스타파씨가 경찰을 따라 병원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사촌형 압둘로흐씨를 살해한 혐의로 그의 두 팔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무스타파씨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현장을 출동했을 때 압둘로흐씨는 목 주위에 7차례 정도 흉기에 찔려 숨진 상태였다. 폐쇄회로(CC) TV가 없는 곳에서 발생한 일이다 보니, 경찰은 칼부림 끝에 무스타파씨가 사촌형을 살해한 뒤 피해자인 척 신고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무스타파씨는 경찰 조사에서 끊임없이 혐의를 부인했다. 형사들은 그를 살인자로 단정 짓고 "어떻게 죽였느냐"고 물었다. 무스타파씨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반복해서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무스타파씨는 "흉기에 찔린 지 3일밖에 되지 않아 소독이 필요했지만 유치장에선 항생제만 처방받았다"고 말했다. 무스타파씨는 1월 18일 수원지검에 구속송치되면서, 수원구치소에 갇히게 됐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구치소는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무스타파씨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구치소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열흘 가까이 이런 상황을 회사에 알리지 못한 것도 걱정이었다.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무스타파씨에게 국선 변호사가 붙었지만 별다른 법률 조언을 받지 못했다. 무스타파씨는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넣어달라" "회사에 사정이라도 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스타파씨는 결국 결혼식 당일에도 구치소에서 보내야 했다.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살인사건'을 수사한 최희정 검사가 수원지검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영훈 기자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살인사건'을 수사한 최희정 검사가 수원지검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영훈 기자


검찰, 타살 아닐 수 있다고 보고 전면 재수사

수원지검 형사3부(부장 김성원) 최희정 검사는 무스타파씨 송치사건을 살펴보다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경찰에서 작성한 '변사자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목 자창 부근에 수회의 '주저흔'이 있었다. 주저흔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흔적이기 때문에, 최 검사는 사건을 처음부터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목격자가 없는 사망 사건에선, 결국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해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최 검사는 압둘로흐씨의 사망이 타살이 아닌 극단적 선택일 수 있다고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부검감정서와 혈흔 감정서 등 여러 증거들을 분석했다. 국과수 부검감정서엔 '변사자의 경부자창(목덜미 부근 흉기에 의한 상처)은 타살보다는 자살로 사망한 시신에서 볼 수 있는 형태에 가까워 보인다'는 의견이 기재돼 있었다. 앞서 경찰은 사망자가 자신의 신체 한 곳만 집중적으로 찌르는 것은 경험칙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타살로 결론 내렸다. 최 검사는 이에 국과수에서 자문을 받기로 했다. 국과수 관계자들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할 때는 자신의 목을 집중적으로 찔러서 죽는 경우가 많다"고 대답했다.

혈흔 감정서도 무스타파씨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사건 당시 무스타파씨가 입고 있던 반바지 등 옷가지들에서 압둘로흐씨의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무스타파씨가 문 밖을 나서며 벗어던진 반팔 티셔츠에도 사촌형의 피는 없고 오로지 무스타파씨의 피만 묻어 있었다. 최 검사는 여러 증거들을 토대로 사건을 전면 재구성할 수 있게 됐고, 압둘로흐씨 가족을 통해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최 검사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최 검사는 '정인이 사건'을 재감정했던 이정빈 가천대 의과대 법의학과 석좌교수에게 부검감정 의뢰를 요청했다. 이 교수 역시 해당 사건은 피해자의 극단적 선택이라고 봤다. 이 교수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피해자의 목 5㎝ 원 안에 7군데의 칼자국이 집중적으로 있는데, 알코올농도가 0.01% 미만이고 약물 반응도 나오지 않는 변사자가 다툼 속에서 싸운다면 상처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검찰은 결국 정신질환이 있던 압둘로흐씨가 즉흥적으로 무스타파씨를 찌르고, 그가 도망가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최 검사는 지난달 2일 무스타파씨에 대한 구속을 취소하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에게 범죄피해자 지원을 하기로 했던 부분에 대해 수원지검 형사3부 김성원 부장이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영훈 기자

우즈베키스탄 국적 노동자 무스타파(가명·27)씨에게 범죄피해자 지원을 하기로 했던 부분에 대해 수원지검 형사3부 김성원 부장이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영훈 기자


결혼, 집, 직장 잃게 만든 누명... 검찰, 지원 나서

23일 동안 구금생활을 했던 무스타파씨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려는 검찰의 노력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였다. 구치소를 나왔지만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자신의 집은 사망사건이 발생한 끔찍한 현장이 돼버렸고, 그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단 한 벌의 옷가지도 챙기지 않은 채 동료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집에 얹혀살고 있다. 회사는 장시간 연락이 닿지 않자, 무스타파씨를 해고해 버렸다. 살인 누명이 결혼은커녕 기존에 있던 집과 직장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검찰은 무스타파씨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피해자 지원에 나섰다. 수원지검 범죄피해자 경제적 지원 심의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김성원 수원지검 형사3부장은 지난달 심의위원들과 함께 만장일치로 무스타파씨를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무스타파씨는 이에 지난 3일부터 △치료비 △생계비 △심리상담비 등을 지원 받게 됐다. 그가 코리안드림을 접지 않고 간직할 수 있게 된 이유다. 무스타파씨는 "지난 한 달이 지옥 같았고, 앞으로도 그때의 악몽이 계속 생각나겠지만, 이번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취업을 알아보는 등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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