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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그, '유전자 재조합' 영광과 비난의 과녁이 되다

입력
2023.03.0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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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그는 1971년 서로 다른 유기체의 DNA 일부를 이어 붙이는 유전자 재조합 실험에 성공, 8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스탠퍼드대 생화학자다. 그는 학계 안팎의 우려와 비판에 직면한 뒤 후속실험을 스스로 중단하고 재조합유전자 실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어쨌건 그의 성취로 유전공학이란 학문과 생명공학산업이 탄생했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 등에 대한 우려와 논란도 만만찮지만, 암을 비롯한 수많은 유전-자가면역성 질환 치료 및 백신 개발의 길이 열렸다. 유전학계에서는 71년 이전을 'B.C(Before Cloning)'라 농담처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80년 10월, 노벨상 발표 직후 축하전화를 받는 폴 버그. AP 연합뉴스

폴 버그는 1971년 서로 다른 유기체의 DNA 일부를 이어 붙이는 유전자 재조합 실험에 성공, 8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스탠퍼드대 생화학자다. 그는 학계 안팎의 우려와 비판에 직면한 뒤 후속실험을 스스로 중단하고 재조합유전자 실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어쨌건 그의 성취로 유전공학이란 학문과 생명공학산업이 탄생했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 등에 대한 우려와 논란도 만만찮지만, 암을 비롯한 수많은 유전-자가면역성 질환 치료 및 백신 개발의 길이 열렸다. 유전학계에서는 71년 이전을 'B.C(Before Cloning)'라 농담처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80년 10월, 노벨상 발표 직후 축하전화를 받는 폴 버그. AP 연합뉴스

1972년 10월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 ‘원숭이바이러스40(SV40) DNA에 새로운 유전정보를 삽입하는 생화학적 방법’이란 제목의 논문이 게재됐다. 자연 상태에서는 결코 섞일 리 없는 서로 다른 유기체의 DNA를 재조합(recombinant)한 ‘rDNA’를 처음 만들어냈다는 의미, 생명체 유전 정보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다. 53년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진 지 19년 만에, DNA가 인위적으로 변형-편집할 수 있는 공학적 대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논문의 저자가 스탠퍼드대 생화학자 폴 버그(Paul Berg, 1926.6.30~2023.2.15)였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제약업계는 선천성 유전질환과 유전자 변이에 의한 암 등 후천성 질환 치료에 백신 등 신약 개발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주요 대학들도, 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 온 뒤 버섯이 솟아나듯” 잇달아 연구소를 설립해 실험에 뛰어들었다. 불과 1년 만에 버그의 방식보다 간편하게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하지만 rDNA는, 비유하자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분자 단위에서, 외과적 기법이 아닌 생화학적 기법으로, 가상이 아닌 실제로 탄생한 셈이었다. SF 좀비 영화에서처럼, rDNA가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갈지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가 종교계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제기됐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위스콘신 매디슨대 종양학자 바츠와프 시발스키(Waclaw Szybalski)의 85년 진단처럼 “물리학자들이 원자폭탄으로, 화학자들이 고엽제로 유죄 판정을 받은 마당에 이제 생물학자들이 뭔가를 저지르려고 애쓰고 있다는 식”이었다.

훗날 버그는 자신의 논문이 일으킬 후폭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우리는 조용히 후속 연구와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알아채기 전에 등 뒤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rDNA를 포유동물의 몸에 이식하려던 후속 실험을 스스로 멈추고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왓슨을 비롯한 10명의 과학자와 함께 74년 과학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rDNA 실험의 잠재적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질 때까지 실험을 유예하자는 이른바 ‘버그 레터’를 게재했다. 당시 국립과학아카데미 생명과학분과 rDNA분과위원회 의장이던 그는 동료 학자들과 함께 이듬해 2월 캘리포니아 퍼시픽그로브에서 대규모 과학자 대회(Asilomar Conference)를 개최했다. 16개국 과학자와 법률가 등 150여 명이 모여 사흘간 진행한 그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왓슨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상 처음 과학자들이 스스로 연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rDNA 연구 가이드라인’을 마련했고, 이듬해 미국립보건원(NIH)을 통해 공식화했다. 대회가 열린 그해 노벨생리의학상을 탄 데이비드 볼티모어(당시 MIT 교수)는 그 자리를 ‘생물학자들을 위한 겸손의 훈련(exercise of humility)’이었다고 평했다.

자신이 일으킨 rDNA 파문이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지 않도록 자진해서 방파제로 나서긴 했지만, 그는 정치-자본의 간섭 없이, 연구자의 책임과 과학적 필요에 따른 연구의 자유를 일관되게 옹호했다. 8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폴 버그가 별세했다. 향년 96세.

유전자 변형 농산물 종자 독점 기업인 몬산토와 GMO 식품에 반대해 2013년 5월 세계 52개국 436개 도시에서 '몬산토 반대 행진' 시위가 열렸다. 사진은 버몬트주 주도 몬트필리어 시민들의 시위 장면. AP 연합뉴스

유전자 변형 농산물 종자 독점 기업인 몬산토와 GMO 식품에 반대해 2013년 5월 세계 52개국 436개 도시에서 '몬산토 반대 행진' 시위가 열렸다. 사진은 버몬트주 주도 몬트필리어 시민들의 시위 장면. AP 연합뉴스

폴 버그는 러시아(현 벨라루스)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3남 중 장남으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의류제조업체를 운영한 아버지 덕에 그는 뉴욕 최초의 ‘빗장공동체’라는 코니아일랜드 끝 ‘시게이트(Sea Gate)’ 단독주택 단지에서 성장했고, 무척 영민해서 중학교를 조기 졸업한 뒤 만 17세에 뉴욕시티칼리지 화학공학과에 입학, 곧장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2차대전 전시였지만 그는 나이가 어려 해군 비행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훈련이 유예된 틈에 펜실베이니아대 생화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공장보다는 실험실에서, 화학 공정보다 생체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사건을 탐구하는 게 훨씬 매력적으로 여겨졌다고 그는 80년 노벨위원회에 제출한 자전에세이에 썼다. 생화학이 농작물 ‘품종개량’ 수준을 벗어나 생명 활동의 화학적 비밀 속으로 돌진하던 무렵이었다. 버그는 학창시절 싱클레어 루이스의 의학소설(‘Arrowsmith’)과 폴 드크루이프의 ‘미생물 사냥꾼(Microbe Hunters)’을 탐독하기도 했지만, 방과 후 과학클럽을 운영하며 탐구와 실험으로 스스로 해답을 찾는 매력을 일깨워준 과학교사(Sophie Wolfe)의 영향이 컸다고, “돌이켜보면 호기심과 해법을 탐구하는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여다. 세월이 흘러 이제 당시 배운 것을 대부분 잊었지만, 그때 경험한 발견의 흥분은 결코 잊지 않았다”고 썼다.

버그는 만 3년 군 복무 후 2년 만에 학부를 마치고 48년 오하이오주 웨스턴리저브대(현 Joint Western Reserve University)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구 주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탄수화물 대사-단백질 합성 과정을 추적하는 거였다. 그는 당시 그 분야에서 가장 매력적인 논문을 내던 곳이 “들어본 적도 없던” 웨스턴리저브여서 서슴없이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탄소대사과정에서 엽산과 B12보조인자의 역할을 규명한 논문으로 5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덴마크 코펜하겐 세포생리학연구소에서 효소 연구로 1년 박사후과정을 거친 그는 54년부터 워싱턴대에서 분자생물학 연구로 방향을 선회했다. 왓슨-크릭이 DNA 구조를 밝혀낸 직후였고, DNA 중합효소를 발견해 유전-생명 현상의 화학적 메커니즘을 밝힌 아서 콘버그(Arthur Kornberg, 59년 노벨상)가 그의 지도교수였다. 둘은 59년 스탠퍼드대로 옮겨 생화학과를 신설했고, 버그의 관심사는 미생물에서 포유류 유전자 연구로 확장돼, 솔크연구소에서 약 1년간 원숭이를 숙주로 한 종양 바이러스(SV40) DNA 연구를 병행했다. 그 성과가 71년의 유전자 재조합, 즉 SV40의 DNA를 대장균(E.coli) 바이러스의 DNA와 조합하는 거였다. 버그의 연구진은 두 바이러스의 원형(圓形) DNA를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s)로 절단해 선형으로 만든 뒤 각각의 끝을 효소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종양 유발 유전자인 rDNA를 만들어냈다. 논문 후폭풍으로 그는 rDNA의 유기체 삽입 후속실험을 중단했다.

스탠퍼드대 동료 학자들은 버그가 실험실은 물론이고 자신이 진행하는 실험과 성과를 논문 발표 전에도 동료 과학자들과 거리낌 없이 공유하는 드문 학자였다고 평했다. 그는 또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의 연구 성과로 특허를 내지 않고 다른 연구자나 제약업계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rDNA 기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화근이었다고 단언하긴 힘들지만, 그의 방식을 응용한 훨씬 간단한 재조합 기술이 73년 (Herbert Boyer, Stanley Cohen에 의해) 탄생했고, 버그가 유예했던 rDNA 유기체 삽입 실험까지 이어졌다. 그 걷잡을 수 없는 폭주에 대한 버그 등의 대응이 74년 ‘버그 레터’와 75년 과학자대회였다.
rDNA에 대한 70년대의 ‘공중보건의학적’ 공포는 결과적으로 다소 과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rDNA 연구는 환경-농업 등 여러 영역에서 빚어진 우려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80년대 간염 백신서부터 근년의 코로나 백신(노바백스), 암을 비롯한 수많은 유전성질병과 자가면역질환 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엄청나게 기여하며 생명공학이라는 학문과 산업을 만들어냈고, 근년의 ‘유전자가위(CRISPR-Cas9)’에 이르기까지 유전자 편집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75년 아실로마 과학자대회에서 합의된 rDNA 연구 가이드라인과 논점을 협의하는 76년 미국립보건원 패널회의. nih.gov

75년 아실로마 과학자대회에서 합의된 rDNA 연구 가이드라인과 논점을 협의하는 76년 미국립보건원 패널회의. nih.gov

버그는 과학자들이 스스로의 연구에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과학의 자유를 옹호했다. 정치나 자본이 아닌 과학 자체의 필요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기를 원했고, 성과 역시 과학적 가치 기준에 따라 평가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2001년 노벨상 수상자 79명과 함께 당시 대통령 조지 W. 부시에게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공개 편지를 썼고, 2004년 줄기세포 연구 및 자금지원 기관인 캘리포니아 재생의학연구소 설립을 위한 ‘캘리포니아 주민발의 71(California Proposition 71)’에 앞장섰다. 하지만 부시 정부가 2003년 그릇된 과학적 근거로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한 데 대한 공개 비판 서한에도, 20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동참했다.

아실로마 대회 25주년이던 2000년 2월 60여 명의 과학자와 법률가 윤리학자 등이 같은 장소에 다시 모였다. 원년 합의의 의미를 되새기고, 근래의 과학-윤리적 과제들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 위한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rDNA 연구의 긍정적인 면 못지않게 다수의 연구가 학문적인 동기보다 영리 목적의 단기 프로젝트 위주로 진행되는 경향을 우려했다. 사흘간 참가자들은 유전자 치료, 특히 변형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식선 치료의 무분별한 실험과 다른 종의 장기 인체 이식, 유전자 변형 농산물, 줄기세포 연구 등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했지만, 25년 전과 같은 합의를 도출하진 못했다.

이듬해인 2001년 말 노벨위원회 인터뷰에서 버그는 “(생명공학산업이) 학술기관에 자금을 대고 연구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건 긍정적이지만, 대학들마저 상업화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누구도 특허를 기대하지 않았고, 나 역시 평생 특허를 낸 적이 없다. 우리는 연구에 도움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줬지만, 요즘 대학은 특허 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창업을 돕는다.” 그는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75년 회의에서 과학자들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는 공중보건의 잠재적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는 대전제만 있었지, 생명 윤리나 영리 등의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버그는 “이제는 학계도 사안별로 확고한 견해를 지닌 이들로 분리돼 있고, 각기 지지층이 존재한다. 줄기세포 연구를 해야 한다거나 금지해야 한다고 서로를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며, 다만 스쳐 지나가듯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특정 연구가 위험을 초래할 명백한 증거가 있더라도 일정기간(5년) 연구를 유예한 뒤 다시 검토하는 방식으로 가야 하며, 아예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법은 허점이 드러나도 금세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18년 중국 과학자들의 ‘유전자 편집 쌍둥이 출산’에 그 역시 과학자 17명과 함께 신생아 실험의 윤리성을 공개적으로 성토하면서도 실험 중단이 아닌 ‘최소 5년 실험 유예’를 촉구했다.

1940년대 펜실베이니아 학부 시절의 폴 버그(오른쪽)와 당시 약혼녀 밀드레드 레비(2021년 작고). 고교시절 아르바이트 일터에서 만난 둘은 1947년 결혼해 1남을 낳고 해로했다. 가족사진, nih.gov

1940년대 펜실베이니아 학부 시절의 폴 버그(오른쪽)와 당시 약혼녀 밀드레드 레비(2021년 작고). 고교시절 아르바이트 일터에서 만난 둘은 1947년 결혼해 1남을 낳고 해로했다. 가족사진, nih.gov

그는 돈이 아니라 기쁨이 자신이 과학자가 된 이유이자, 과학자로 산 이유라고 말하곤 했다. “이 연구로 사업이 가능할까, 특허를 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문제의 해답을 찾고 논문을 발표하고, 그 지식이 널리 활용되는 데서 오는 희열을 늘 생각한다.” 제자들도 그러기를 원했다. 베트남전 반전 집회가 한창이던 71년 스탠퍼드 캠퍼스에서 자신의 수업을 들은 학부생들이 단백질 합성 과정을 춤으로 표현하겠다며 저예산 영화(‘단백질 합성: 세포 단위의 서사시’) 기획안을 들고 찾아오자 학과장이던 그는 두말 않고 제작비용을 지원하고 직접 출연까지 했다. 버그는 “학생들이 강의실-연구실에서 뛰어나가 농성과 시위를 벌이던 때였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공감했다. 하지만 배는 계속 운항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역시 그가 강조해온 ‘(자유와 책임의) 균형’의 한 예였다.

그는 고교시절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 일터에서 만나 47년 결혼한 아내(Mildred Levy, 2021년 작고)와 1남을 두었다. 2000년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서, 200여 편의 논문(공저 포함)을 낸 학자로서, 은퇴 후엔 과학행정 자문가 등으로 살았고, 노벨상 외에도 수많은 상을 탔다. 그는 스탠퍼드 의대생들의 추천으로 대학이 수여하는 ‘탁월한 강의상(Henry J. Kaiser Award for Excellence in Teaching)’을 2회 수상한, 드문 교수 중 한 명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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