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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처럼 센 척하며... 다시 튀어오르는 믿음

입력
2023.01.07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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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일깨운 용기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개봉한 4일 서울의 한 영화관 풍경. 뉴시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개봉한 4일 서울의 한 영화관 풍경. 뉴시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강백호는 왜 그리도 무례한가. 머리가 하얀 안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잘도 던진다. 그것도 궁금해서가 아니라 “나는 지금입니다”라는 제 한마디 하기 위함이다.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화법이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헤집는 건 언제나 무해한 질문이 아닌 무례한 질문 쪽이 아니던가. 내게 던진 질문도 아닌데 나는 이미 답을 고민하고 있다. 내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지? 있긴 했을까?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걸까? 기억나지 않는 시대를 영광의 시대라고 호명할 수 있을까? 혹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건가? 언제쯤 올까? 오기는 올까? 평범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물음표가 증식될 뿐이다. 이제 50세가 다 된 강백호씨에게 저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 당신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여전히 그때입니까?

극장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만화 '슬램덩크'와는 달리 가드 송태섭(가운데)이 주인공이다. 에스엠지홀딩스 제공

극장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만화 '슬램덩크'와는 달리 가드 송태섭(가운데)이 주인공이다. 에스엠지홀딩스 제공


거부하기 힘든 '슬램덩크'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다. 32년 전에 처음 세상에 나온 만화를 이제 와서 영화화시킨 원작자(이노우에 다케히코)나 그 떡밥을 덥석 무는 팬이나 20세기가 남긴 유난스러운 유물들 같다. 원작에 열광하는 사람치고 원작의 영화화를 마냥 환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을 아무리 궁금해도 열지 말아야 한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알고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결국 열어버리고 세상은(팬들은) 혼란에 빠지기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100% 자유의지로 버튼을 꾹꾹 눌러 예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패배한 사람의 심정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지는 게임을 하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선 선수처럼 축 처진 어깨로. 그런데 말입니다. 그곳에는 이마를 딱 치게 만드는 게임의 묘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고로 게임이란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역시 상자를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내 예상을 뒤엎고 굉장한 감동과 눈물과 재미를 선사했다. 어느 방향으로 무릎을 꿇어야 할지! 강백호가 걸핏하면 나는 천재니까 '드립'을 치는 건 원작자이자 감독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본인이 천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재의 천재 드립이라니. 재수 없어 하기에도 너무 천재적이라 입을 다물 수 없다. 가슴 언저리에 ‘인정’이라는 자막을 띄우고 그저 끝없이 손뼉만 치고 싶다.


두렵지? 나도 두려워

영화는 송태섭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지역 에이스로 꼽히는 형에게 농구를 배우는 송태섭의 나이는 내가 농구를 처음 접한 때와 비슷하다. 십 대 초반 여름 바닷가 작은 마을, 작은 농구장, 키 차이가 크게 나는 형제. 몇 개의 겹치는 요소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내 형제는 송태섭의 형, 송준섭처럼 멋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준섭은 주전이 되고 싶다는 태섭과 진지한 1:1 게임을 한다. 최선을 다해 게임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존중임을 보여주는 한편 태섭에게 알려준다. ‘피하지 말고 쉽게 등 돌리지 말고 돌파하라’고. 태섭은 그의 말대로 해보지만 잘되지 않는다. 넘어진다. 공을 뺏긴다. 이를 꽉 깨문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돌파에 성공한다. 그런 태섭의 어깨를 안아주며 준섭은 그 느낌을 기억하라고 한다. 어떤 말은, 어떤 순간은, 어떤 경험은 일생을 따라다닌다. 그렇게 태섭은 형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치고 좌절하고 뚫고 지나가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채치수(왼쪽)와 강백호는 만화 속 인물과 동일한 캐릭터이나 비중은 조금 작아졌다. 에스엠지홀딩스 제공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채치수(왼쪽)와 강백호는 만화 속 인물과 동일한 캐릭터이나 비중은 조금 작아졌다. 에스엠지홀딩스 제공


난 누구냐?

북산 대 산왕의 경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내 마음이 기울어지는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고 추궁하고 분투하는 장면들이었다. 채치수는 전국 1위의 명성을 가진 신현철을 대적하며 그와 자신을 비교하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마침내 ‘신현철은 신현철, 채치수는 채치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걸 지켜보던 정대만은 ‘난 누구냐?’ 라고 자문하더니 익히 알려진 명대사로 자답한다.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한편 자타가 믿는 자기 자신을 깨고 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인물도 있다. 여러모로 완성된 것처럼 보이던 서태웅이 패스를 할 때 모두가 충격에 빠진다. 천하의 서태웅이 패스를 한다고? 완벽한 독불장군이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걸 내려놓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는 자신을 기억해내는 것으로, 누군가는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믿음에 대하여

안 선생님은 강백호를 이용해 경기의 흐름을 바꾼다. 20점 차이로 뒤처진 게임에서 ‘기존에 해왔던 방식은 내게 통하지 않아. 난 초짜니까!’라고 외치는 강백호. 그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실력을 갖췄지만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라는 안 선생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는 심판의 책상에 올라가 이미 북산이 졌다고 확신하는 관중들을 향해 우리는 승리할 거라고 선언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돌파구를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쳐가는 팀원들에게 ‘너네는 지고 싶은 거냐’라며 날벼락을 내리꽂는다. 경기의 흐름을 바꾼다는 건 믿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을 믿는 것이다.

1일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새해 첫 해돋이를 감상하고 있다. 부산=뉴시스

1일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새해 첫 해돋이를 감상하고 있다. 부산=뉴시스


새해라는 새로운 경기

어김없이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마지막 출근날과 새해 첫 출근날이 숨 막히게 똑같은데 어떻게 새로운 시작의 기분을 도출해야 할지 난감한 요 며칠이었다. 전혀 설레지 않는데 설레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섣부른 패배감. 마치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졌는데도 코트에 발을 내딛기는커녕 유니폼도 입지 못한 채 꼬꾸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스스로 발을 걸고넘어진 것과도 같았던 형국에서 별 기대 없이 만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속이 깊고 뜨거운 동료처럼 나를 일으켰다. 처음 농구를 배우던 열세 살의 여름이 손을 흔들었고, 하늘로 솟구치는 마음과 달리 자꾸 가라앉는 몸을 끌어올리던 시절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농구공이 들어갈 때 슬로모션 효과를 건 듯 느리게 흐르던 시간, 슛이 들어가기 직전 모두가 숨을 죽이는 찰나의 정적 그리고 공이 그물에 감기는 소리, 터져 나오는 함성 혹은 깊은 탄식. 심해처럼 푸른 농구 코트와 그 위로 떨어져 검은 자국을 만들던 땀들, 한입씩 돌려먹던 음료수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1일 오전 제주 한라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는 시민들. 뉴시스

1일 오전 제주 한라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는 시민들. 뉴시스


두려운 쪽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 송태섭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두 명의 수비를 뚫고 돌파하는 장면이 있다. 송태섭은 등 돌리지 않고, 피하지 않고, 가장 두려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최고의 가드라는 평가를 받는 적수의 위용에 겁먹지 않고 자신의 빠른 발을 믿고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동료에게 패스한다. 그렇게 승점을 가져온다. 나는 새해라는 경기를 앞두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에 미리 겁을 먹고 내가 가진 장점을 잊어버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경기에서 내가 맛볼 수 있는 희열을 잊어버렸다.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지만 송태섭에게 돌파를 알려준 송준섭처럼 ‘두렵지만 센 척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흐름을 바꿔버리는 강백호처럼 승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골 넣고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드리블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슛 찬스가 보일 거고, 안 보이면 패스하면 그만이다.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은 우리가 승부를 포기하는 때라는 것을 기억하며 나 자신을 믿고 내 편을 믿으면서 돌파해나가는 거다. 그래도 안 되면 ‘나는 천재니까’ 드립을 치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돌파감을 키우기 위해 일단은 농구공을 들고 차가운 코트로 나간다. 공이 튀어 오른다. 2023년이 튀어 오른다.

길거리 농구로 즐거운 한때. 한국일보 자료사진

길거리 농구로 즐거운 한때.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소희 작가·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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