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대체텍스트

알림

MS·구글 직원도 쓰는 한국 앱... 블라인드는 실리콘밸리를 이렇게 뚫었다

입력
2023.01.02 04:30
수정
2023.01.02 09:42
0 0


편집자주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과 구글, 종이 간판을 붙인 사무실에서 출발한 아마존. 빅테크의 시작엔 세련됨은 없었지만, 열정과 기백이 가득합니다. 시작은 미약할 수 있어도, 끝은 창대할 '창업의 기적'은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죠. 곧 유니콘으로 떠오를 수도 있는 유망 스타트업의 풋풋한 시작, 그 성공담의 프리퀄을 지금 실시간으로 만나봅니다.


2017년 6월 미국 최대 차량공유업체 우버를 이끌던 트래비스 캘러닉 공동 창업자가 휴직을 하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0년 우버를 창업하고 기업가치를 76조 원까지 키운, 실리콘밸리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캘러닉의 퇴장은 우버의 전직 엔지니어 수잔 파울러가 사내 성희롱을 고발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파울러는 우버 재직 당시 이 사실을 회사에 보고했지만 무시당했다고 주장했다.

파울러의 폭로 뒤, 우버 현직 직원들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모여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우버 직원들은 블라인드의 익명성을 이용해, 그간 불이익 당할까 쉬쉬 했던 회사의 부당한 행태를 활발히 공유했다. 회사의 각종 추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면서, 결국 우버 경영을 책임지던 캘러닉은 2선 후퇴를 선언했다.


[곧 유니콘] 김성겸 팀블라인드 이사

2014년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해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 온 김성겸(38) 팀블라인드 이사에게 이 사건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우버 직원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블라인드를 썼다고 해요. 실리콘밸리에서 제일 주목 받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니, 캘러닉의 파워가 얼마나 막강했겠어요. 직원들 입장에선 캘러닉 비리를 얘기할 기회가 없었는데, 블라인드가 대나무숲 역할을 제대로 한 거죠."

우버 사태는 블라인드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팀블라인드와 김 이사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정말 미국에서 블라인드가 통할까' 했던 의심을 날려버린 사건이었다. 그렇게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지 8년, 블라인드는 미국, 한국 등에서 700만 명이 쓰는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성장했고, 적어도 실리콘밸리에선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앱이 됐다.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MS)·메타 직원들도 회사와 관련해 말 못할 고민이 생기면 블라인드를 찾는다.

블라인드의 성공은 그러나 운 좋게 찾아온 우연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다. 의심, 고비, 고난의 순간이 끊이지 않았고, 난관을 앞에 두고 남모를 고충과 비범한 노력이 이어졌다. 험난한 미국 시장 진출을 초반부터 이끈 김성겸 이사를 만나 생생한 실리콘밸리 개척기를 들어봤다.

현재 한국, 미국을 포함한 블라인드 가입자는 700만 명이 넘는다. 우버 직원의 80% 이상, 아마존은 70%, 애플은 70% 이상이 블라인드에 가입해 있다. 앱스토어 앱 소개 화면 캡처

현재 한국, 미국을 포함한 블라인드 가입자는 700만 명이 넘는다. 우버 직원의 80% 이상, 아마존은 70%, 애플은 70% 이상이 블라인드에 가입해 있다. 앱스토어 앱 소개 화면 캡처



#1. 칸막이

국적 불문, 직장인들이 블라인드를 찾는 이유

김 이사는 2013년 12월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블라인드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다. 티몬 근무 시절 알게 된 문성욱 팀블라인드 대표의 제안을 받고 합류했다. 사업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부터 '이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김 이사 스스로가 바로 이런 앱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재학 중 티몬 영업 담당으로 참여해 약 3년 간 근무했다. 퇴사 직전엔 150명 안팎의 국내 영업 조직을 이끌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관리직에 오른 셈이었다. 그 때 그는 단기간에 몸집을 불린 스타트업이 겪는 성장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첫 직장에 다니면서 회사가 10명에서 1,000여 명까지 커지는 걸 봤어요. 정말 짧은 시간에요. 회사가 갑자기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들, 특히 소통의 단절이 왜 생기는지를 직접 보고 경험했죠."

전체 직원이 10명 정도일 땐 한 방에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했고, 의사 결정도 빨랐다. 그러나 회사가 커지면서 소통을 방해하는 칸막이가 늘어갔다. 칸막이는 각 부서나 팀 사이에도 생겼지만, 관리자와 직원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나이가 비슷한 동료들이 자신에게 편히 말하지 못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자신은 그들을 예전처럼 대했지만, 직급이 다른 것만으로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직접 소통을 못 하게 되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사가 싫어하진 않을까' 신경쓰게 돼요. 그러다보면 할 수 있는 얘기가 굉장히 제한될 수밖에 없죠."

블라인드가 한국에 출시되고, 안정적으로 성장하자, 팀블라인드는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직장 고민이 한국인들에게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미국 거주 경험이 있어 의사 소통이 가능했던 김 이사가 중책을 맡았다. 그렇게 김 이사가 짐을 싸 미국으로 떠난 게 2014년이었다.

블라인드의 미국 진출을 주도한 김성겸 팀블라인드 이사가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이사의 뒤쪽엔 팀블라인드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이미지가 벽에 걸려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블라인드의 미국 진출을 주도한 김성겸 팀블라인드 이사가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이사의 뒤쪽엔 팀블라인드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이미지가 벽에 걸려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2. 신뢰

백 개 회사의 백 명보다, 한 개 회사의 백 명이 믿고 쓸 수 있도록!


김 이사가 향한 곳은 미국 중에서도 실리콘밸리였다. 테크 업계 종사자들이 새로운 앱에 대한 수용도 빠를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왔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국에선 창업자 지인들을 중심으로 이용자를 늘리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미국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라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어요. 그래서 먼저 한인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했죠."

블라인드는 회사 소속임을 인증한 직원들만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팀블라인드는 100개 회사에서 100명이 가입하는 것보다 한 개 회사의 100명이 가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똑같은 백명이라도 한 회사당 한 명만 가입하면 게시판이 활성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은 미국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미국 테크업체 중 직원 수가 가장 많은 아마존에서 가입자가 늘자, 곧장 아마존 본사가 있는 시애틀로 향했다. 그리고 아마존의 한국계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집을 얻었다. 그들과 최대한 교류하기 위한 환경을 만든 것이다.

"블라인드는 믿음이 중요하거든요. 믿지 못하면 누가 와서 솔직한 얘길 쓰겠어요. 그래서 신뢰를 먼저 형성하려 했어요. 매주 아마존 직원들과 만나고, 집에서 김치찜 파티도 열었죠. 그렇게 서서히 친해지면서 신뢰가 생기니까 블라인드를 써줬고, 한인들을 중심으로 아마존 가입자가 계속 늘 수 있었어요."

MS에선 사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홍보 아이디어를 얻었다. 몸으로 부딪쳐서 얻은 성과였다.

"사무실 건물 지하 주차장까지는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 구조더라고요. 그래서 블라인드 전단지를 가져와서 몰래 엘리베이터와 입구마다 붙였어요. 주차장 입구를 안 지나다니는 직원은 없잖아요. 바로 효과가 왔죠. 나중에 들어보니 청소하시는 분들이 회사에서 붙인 건 줄 알고 떼질 않아서 굉장히 오래 붙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팀블라인드에 따르면 현재 아마존 전체 직원의 70% 이상, MS의 60% 이상이 블라인드에 가입해 있다. 블라인드 유명세에 일조한 우버의 경우 직원 80% 이상이 블라인드를 쓴다.

#3. 미국

미국을 원한다면, 왜 미국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부터 찾아라.

토종 한국산 앱이 미국에서 자리 잡은 경우가 드물다 보니, 김 이사는 가끔 한국 스타트업 사람들로부터 미국 진출에 관한 조언을 요청 받는다. 그때마다 그는 먼저 "왜 글로벌로 가야 하는지, 왜 미국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내리라"고 말한다. 뚜렷한 목표와 의지가 없다면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낮다. 그리고 한국도 충분히 크고 좋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한국 직장인들이 겪는 문제, 소통의 어려움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분명 미국 직장인들에게도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미국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어요. 많은 기업 본사가 몰려 있는 곳이니까요.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직장인들이 쓰는 앱을 만드는 게 목표고, 미국은 다른 시장으로 확장성이 가장 큰 시장이기 때문에 미국을 찾는 게 당연했던 거죠."

미국에서 블라인드는 더 이상 테크기업 직원들만 쓰지 않는다. 워낙 이직이 잦은 곳이 미국이라, 블라인드를 써 본 빅테크 직원들이 다른 업계로 옮겨 가면서 블라인드를 함께 전파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회사들을 공략했는데도 생각지도 못하게 뉴욕, 텍사스, 캐나다 등에서도 가입자가 빠르게 늘고 있어요. 선택과 집중을 하다보니 새로운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 같아요."

이용자가 다양한 지역, 업종, 직군으로 확대되면서, 블라인드는 기업 내부의 '이야기'에만 주력해 온 수준에서 벗어나 직장·채용과 관련한 종합 플랫폼으로 발돋움하려 노력 중이다.

"직원은 구직할 때 정보를 얻기 위해, 기업은 채용 시장 트렌드와 직원들의 생각을 알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찾을 수밖에 없는 플랫폼으로 키워갈 겁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