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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과 ‘자숙경찰’

입력
2022.12.03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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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성큼 다가온 감시 사회,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자숙 경찰’ 소동은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폴리옵티콘(polyopticon)’이라는 감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일러스트 김일영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자숙 경찰’ 소동은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폴리옵티콘(polyopticon)’이라는 감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일러스트 김일영

◇성공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한 일본 사회

한국처럼 일본도 성공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해 온 나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지역 간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도시나 마을의 출입을 봉쇄하는 과격한 방역 조치가 단 한 번도 내려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한때 집합 제한이나 마스크 착용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런 조치들도 시민들에게 자숙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자발적으로 휴업하는 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시민들에게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강제성은 없었다. 글로벌 팬데믹이 선언되었던 초기만 해도, 일본 정부의 방역 대책에 불안과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외국인의 입국은 철저히 막으면서, 국내 감염 확산을 막는 조치에는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디지털 플랫폼과 보건 행정망을 활용한 방역 대책이 빠르게 수행되고 있었던 만큼,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아날로그 행정과 느린 업무 추진 방식이 일본에서도 적지 않게 구설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일본도 코로나19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크지는 않다. 한때 확진자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코로나19 발병률, 치명률이 줄곧 세계 최저 수준이다(최근 수치는 https://coronaboard.kr를 참조).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독감 유행기나 꽃가루 알레르기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는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개인적인 위생 관념이 철저하고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생활 문화 덕분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문화가 강제성이 없는 정부의 요청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시민 정신을 뒷받침했다는 평가도 있다.

◇SNS의 ‘자숙 경찰’ 등 자발적인 감시 행위의 증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한둘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시 행위가 공동체 일원의 건강을 지킨다는 긍정적인 사회적 역할을 획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 초기에 한국에서 방역 당국이 개인의 동선을 낱낱이 수집하거나 추적하는 일이 빈번했다. 확진자나 바이러스에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의 사적인 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되기도 했다. 보통 때라면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을 텐데,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속출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방역 당국의 다소 무리한 감시와 동선 추적에도 납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정부의 방역 대책이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불거진 것도 결국 더 촘촘하고 철저한 감시를 통해 감염을 막아 달라는 요구였다. 감염병 시국을 겪으면서 방역 당국의 감시가 필요악이라고 보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감시 사회가 성큼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 싶다. 다만, 이런 변화가 단순히 국가 권력에 의한 감시가 강화되는 경향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서 ‘자숙경찰(自粛警察)’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적지 않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는 중요한 방역 대책이 시민들에게 자발적인 자숙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를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방역 조치에 협조했지만, 개중에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돌아다니거나 이 지역 저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시민의 자율적인 협력에 기대는 방역 정책에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숙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적발해 내고, 공공연히 비난하거나 드물게는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치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시민들이 서로를 감시, 적발하는 자생적인 단속반이라는 의미에서 ‘자숙 경찰’ 혹은 ‘마스크 경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셜미디어(SNS)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SNS 타임 라인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의 사진이 올라오기라도 하면, 자숙을 실천하지 않는 계정 주인을 질타하는 단속반의 댓글이 달리곤 하는 식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이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타인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도 권장할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자숙 경찰에 대한 여론은 비판적이다.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선한 실천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감염병 사태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타인에 대한 동조 압력과 상호 감시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시민이 훨씬 많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감시라고 하면, 통치 권력이 불순한 의도로 개인의 사적 정보를 수집하는, 은밀하고 불순한 행위를 뜻했다. 예를 들어, ‘팬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은, 간수가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서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수감자의 불편한 상황을 빗대어 감시의 구조를 설명한다. 20세기 중반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에는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는 감시 행위의 부정적인 측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설이 묘사한 것처럼 노골적인 감시와 폭력이 일반화된 암울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자발적이고 유연한 형태의 감시가 만연한 것은 사실이고, 감시의 맥락과 역할도 훨씬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일본의 ‘자숙 경찰’ 소동은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폴리옵티콘(polyopticon)’이라는 감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가 감시자이고 동시에 피감시자인, 전방위적인 감시를 뜻한다. 의외로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이다. 홀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오픈 키친 형태의 레스토랑은 폴리옵티콘의 좋은 사례다. 오픈 키친 구조에서는 손님이 주방을 볼 수 있고, 주방에서도 손님이 보인다. 손님은 주방이 청결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주방에서는 음식에 대한 손님의 반응을 바로바로 체크할 수 있다. 상호 감시 구조가 양쪽에 모두 이득이라는 명분은 좋지만, 사실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해피엔드는 아니다. 오픈 키친은 주방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일본의 자숙 경찰도 과도한 자기 검열을 정당화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전같이 100% 부정적인 역할만을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감시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다.

◇성큼 다가온 감시 사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과제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일본의 ‘자숙 경찰’ 같은 소동이 크게 불거지지는 않았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히 관용을 베풀었다기보다는, 방역 당국의 강력한 행정력과 리더십 덕분에 시민들이 상호 감시와 질타에 몰두할 정도로 불안에 떨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방역 당국에 의한 ‘팬옵티콘’이 모두의 건강을 지키는 힘이 되었지만, 국가 권력에 의한 사적 정보의 추적과 촘촘한 감시 행위가 공적인 역할을 입증한 것은 역시 우려스럽다. 건강과 안전을 빙자해 언제라도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침해할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방역 당국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들이 스스로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상황에 둔감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거대한 감시 권력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감시 권력에 의해 상처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받아든 큰 숙제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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