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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을 욕보이게 하지 않으려면

입력
2022.11.25 04:30
수정
2022.11.25 04:3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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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12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워싱턴 행진 연설 57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20년 12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워싱턴 행진 연설 57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

미국 워싱턴 D.C.를 여행하면서 이 말을 새삼 실감한 적이 있다. 생각을 훔쳐 간 공간은 대강 이렇다. 포토맥강 동쪽 들판에 우뚝 서서 초대 미 대통령 기억을 강요하는 워싱턴 기념탑, 그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북쪽의 백악관, 맞은편 남쪽에 자리 잡은 미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이다. 또 서쪽과 동쪽에 각각 배치된 링컨 기념관과 의사당 그리고 이 네 시설 중간의 공원, 내셔널몰에 자리 잡은 수많은 기념관, 박물관도 방문객들의 의식을 과거 특정 장소로 안내한다. 250년 미국사가 손에 잡힐 듯하고, 어느 모퉁이에선 ‘나에겐 꿈이 있다’던 인권 운동가의 외침도 들린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지위를 확인한다.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겨 제왕적 대통령제와는 결별하겠다던 윤석열 대통령도 사용한 적이 있는 저 짧은 문구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입에서 나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폭격으로 의회가 부서졌고, 재건축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하원 의원들이 더 치열하게 논의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우리는 건물을 짓지만, 나중엔 그게 우리를 짓는다.” 이 명언은 건축학계와 관련 업계가 종교처럼 떠받들었고, 또 다양하게 활용되면서 ‘건물’의 범위는 실내에 그치지 않고 사람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으로 확대됐다.

한국에도 워싱턴 D.C. 같은 공간을 꿈꾸는 곳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시다. 2030년 완공을 목표로 공정률 60%를 기록 중인 이곳에선 곳곳의 건물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그리고 그 건축물의 배치를 통해 국가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공들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또 행정수도를 향한 불가역적 계획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만큼 시간이 갈수록 세종은 행정수도로서의 면모를 더해갈 것이다. 행정수도 건설사업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사업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지방시대’를 약속하고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집권 초반 대통령 집무실 설치 계획을 내놨고, 최근엔 국회도 2028년 말 12개 상임위의 세종시 이전을 목표로 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문제는 국가의 백년대계, 아니 천년의 명운에 영향을 줄지 모르는, 국토 균형발전의 중추적 전략사업인 이 대업에 누구 하나 총대를 메고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토교통부 산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애초 의사결정권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기관이고, 서울에 있는 대통령실은 세종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국무총리실 세종시지원단은 최근 특별자치시도지원단으로 개편하면서 세종시 지원 업무 비중을 줄였고, 인접 지자체로부터 견제받는 세종시는 자체 살림도 버거운 터다.

한국의 행정수도가 미래 세대에 영감을 주고,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공간이 되기 위해선 한국의 위상을 좀먹지 않는 수준의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집무실 마련이 필수적이다. 선거철만 되면 이전 기관들이 정해지고, 정치에 떼밀려 내려오게 된 기관들이 자투리땅에, 빈 땅에 끼워 넣기식으로 건물을 올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종대왕의 이름이 세계 무대에서 조지 워싱턴처럼 반짝이길 기대한다.


정민승 사회부 차장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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