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주식 투자로 수억원 빚지고 "죽겠다" 협박하는 아버지, 원망스러워요

입력
2022.11.21 04:30
24면
0 0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결혼한 뒤 독립해 살고 있는 맏딸입니다. 동생 둘은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요. 요즘 저의 최대 고민은 아버지입니다. 수억대 빚을 진 아버지는 수시로 "죽겠다"는 협박 문자를 보내 저를 괴롭힙니다.

아버지의 빚을 안 건 최근 일이에요. 2년 전 정년퇴직을 한 아버지의 월급 통장으로 들어온 퇴직금이 예상보다 적었고, 어머니가 따져 묻자 대답을 회피하던 아버지는 결국 개인파산 신청을 선언하며 위장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과거 여러 차례 이혼을 요구했던 어머니는 그 배신감에 이혼을 거부하고, 따로 살고 있죠.

제가 미혼이었다면 제가 모은 돈으로 아버지의 채무를 일부 변제할 생각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저 혼자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말조차 꺼내지 않았어요. 내가 꾸린 가정에 아버지로 인해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싫었고, 아버지가 빚을 갚으며 반성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채무 중 일부가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이라는 점이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

퇴직 이후 아버지는 억대의 퇴직금뿐 아니라 대출까지 받아 주식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신혼시절부터 어머니 몰래 주식투자를 해왔다고 해요. 어렸을 때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해왔던 이유가 주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배신감이 들고 화가 났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묻지마 투자 일부를 고모가 부추기고 직접 개입했다는 것도 알게 됐죠. 가족들과 상의 없이 그런 일을 벌이고, 그동안 어머니에게 며느리로서의 의무만 요구하며 괴롭혔던 것,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방관했던 아버지가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어요. 아버지가 당시 4살이던 남동생 앞에서 어머니를 주먹으로 가격해 어머니가 이모집으로 피신했고, 1년여간 동생들과 아버지랑만 살기도 했었죠. 당시 할머니가 우리에게 어머니에 대해 쌍욕과 험담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어머니가 돌아오고 나서도 부부 싸움이 잦았어요. 부부 싸움의 주제는 제사 문제, 며느리의 역할 등 아버지의 원가족과 얽힌 일방적인 불만들이었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로또에 당첨되면 할머니와 고모들에게 나눠주겠다는 말을 항상 해서 어린 마음에 '아빠에겐 할머니와 고모들만 가족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삼남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시집살이로 고생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함과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마냥 무서워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했다가 아버지가 받아서 놀라 전화를 끊은 적이 있을 정도예요.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늘 눈치를 살폈죠. 대학에 진학하며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됐고 마음은 편했지만 한구석엔 그 환경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동생들이 늘 안타까웠죠.

그런 아버지가 요즘엔 자신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를 보내며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잊을 만하면 '죽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고마웠다, 행복해라', '내가 죽으면 친가 쪽 사촌 누구에게 상주를 맡겨라' 등의 문자를 보내 저를 괴롭힙니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로부터 '네 시부모님에게 이 상황을 모두 알리겠다'는 문자를 받고 분노와 실망감에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임신 중이라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연락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요즘엔 내 삶의 일부인 가족이 모두 무너지고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은 허탈한 느낌이 밀려듭니다. 마음 한구석에선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끝날 일이라면 차라리 그렇게 돼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릴 때 부부 싸움과 폭력, 여러 차례 이혼 위기 등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한 아버지, 울타리가 되어주진 못할 망정 지금까지도 자식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희수(가명·30·회사원)

희수씨,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가족의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해줄 수 없는데, 외면할 수만도 없으니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든든한 사랑으로 느껴져야 할 아버지의 존재가 인생의 난제라고 여겨질 정도라면 오랜 시간 갈등과 고통이 너무나 컸을 겁니다.

먼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생각해봅시다. 사연으로 보건데 희수씨의 아버지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 형제와의 정서적 융합이 심한 사람입니다. 성인이 되며 원가족으로부터 개인의 사고와 감정을 분리하고 주도적인 삶을 사는 자아 분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아 분화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원가족의 상태에 따라 감정적으로 쉽게 지배받고, 불안이 자극될 경우 생각과 감정이 균형을 잃어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언행을 보이죠. 아내와 자녀들의 입장에서 그런 아버지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처로 남았을 거예요. 주식투자 실패와 빚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자아 미분화와 투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아 분화 수준이 낮은 부모는 미분화에서 오는 불안을 특정 자녀에게 투사하고, 그 자녀 역시 자아 분화가 어려워 부모와 밀착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의 삶도 힘들었을 거예요. 희수씨의 어머니는 원가족과 밀착된 남편과 정서적 교류 없이 남매 셋을 키우면서 시집살이도 견뎠죠. 아버지에 대해 섭섭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꼈다면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부담스러운 감정이 있었을 겁니다. 첫째 자식인 희수씨가 부모님의 싸움에 개입하거나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고 위로하는 식으로, 부부 갈등을 우회하는 수단으로서의 삼각 관계에 자주 휘말리게 된 이유지요.

양쪽 부모로부터 상처와 부담을 떠안으면서도 희수씨는 그렇게 당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미분화된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부모로부터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부모님이 어떻게 대하더라도 도리를 다하고 싶어 하고, 결혼을 해서도 부모님의 빚에 노심초사하며, 동생들에게 부모 수준의 책임을 느끼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희수씨, 당신은 부모에게 확인을 받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가족의 문제에 과도하게 몰입하다 보면 번번이 지금과 같은 상처가 반복될 수 있어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 하소연을 받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우선 그 마음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아버지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면 그때의 본인 마음에 우선 귀 기울여 보세요. ‘아버지가 충동적이고 극단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너무 무서우면서도 원망스럽고 화가 나. 이젠 내 가족이 있고 내가 지켜 줄 아이가 곧 태어날 텐데, 원가족의 상황이 너무 부담스러워’라는 식으로요. 본인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아버지에게 그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해도 됩니다. 어머니의 하소연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동조하거나 본인이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직접 대화하고 해결하도록 제안하세요. 드라마틱한 해결이 되진 않더라도, 그런 시도를 반복해야 희수씨의 마음을 지킬 수 있고 주체적인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혼자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의 빚을 갚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 주지 못했다고 해서 미안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무엇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의 인생은 당신이 지나치게 희생하면서 감당할 몫이 아니지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보다는 희수씨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자아 분화 수준이 높은 성인은, 원가족과 친밀한 관계는 유지한 채 자기 감정을 존중하며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개별성과 감정을 지키는 수준에서 가족들을 도울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는 이미 스스로가 알고 있을 거예요. 믿을 만한 사람인 남편에게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고, 고민을 진지하게 상의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이미 희수씨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적 도리를 다하려고 하고, 한편으론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도 갖췄습니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진정한 독립을 의미하는 새로운 가족도 이뤘죠. 부모와의 관계에선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제 당신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인생이 시작된 것이죠.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하는 희수씨 되시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손효숙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