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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을 물리치는 바흐의 선율

입력
2022.06.09 20: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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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조은아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잠을 잘 수 있으면 뭐라도 할 것 같다는 학생이 찾아왔다. 퀭한 시선 아래 다크서클이 불면증과의 전투에서 처절한 실패를 증명하는 듯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름의 예식이 있다며 순서대로 읊어주는데 혹시 강박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걱정도 앞섰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가 족욕을 하고, 향초를 피우고, 불면을 쫓는다는 차를 마시고, 눈 찜질팩을 눈두덩이에 올려 잠을 부른다 했다. 그 신성한 예식을 접하며 고민에 휩싸였다. 불면증에 '직빵'이라 믿어 온 음악을 추천하고픈 욕망이 마구 꿈틀거리는데, 한편으론 이 처연한 예식에 음악까지 얹어서 과연 도움이 될까 우려되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을 제칠 수 있었던 건 수면 유도제를 복용하겠다는 선언을 들은 직후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마지막 실마리마냥 음악의 힘을 믿고 싶었다. 예식으로 무장한 학생의 강박이 의외의 선율로 풀리지 않을까. 그러므로 용기를 내기로 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https://youtu.be/aho1yMTkf3w?t=31), 애초 불면증을 물리치기 위해 탄생한 작품을 추천했다.

1802년, 니콜라우스 포르켈이 저술한 바흐의 첫 전기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등장한다. 바흐의 제자였던 골드베르크는 14세 어린 나이에 러시아 대사였던 카이저링크 백작의 음악가로 고용되었다. 백작은 심한 불면증을 겪었는데 골드베르크는 옆방에 머물며 주인이 호출할 때마다 자장가를 연주해야 했다. 불면증이 쉽게 개선되지 않은 채 건강마저 악화되자 백작은 소년의 스승에게까지 조난신호를 보낸다. 한밤중 깨어났을 때 골드베르크가 연주할 수 있도록 '온화하고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위촉했던 것이다. 바흐가 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장르는 '변주곡'이었다. 반복성으로 취침을 유도하면서 다양한 악상으로 생기를 북돋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작곡가는 어린 제자의 이름을 제목에 붙여, 고용주의 불면증으로 덩달아 고생할 골드베르크의 노고를 기렸다. 작품에 만족한 백작은 바흐에게 금화 100개가 가득 담긴 황금 잔을 선물하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대가를 지불한다.

이 일화의 신빙성에 대해선 여러 논쟁이 충돌하고 있지만,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바흐 음악세계의 소우주를 담은 걸작이라는 데엔 이견 없이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거쳐 다시 아리아로 회귀하는 대장정은 연주시간만 해도 1시간을 훌쩍 넘겨버린다. 작곡가가 일생 동안 벼려왔던 음악적 연륜을 능수능란 펼쳐놓는데, 당대 유행했던 다종다양한 음악양식도 용광로처럼 녹여내니 마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 그렇게 거대하지만 굽이굽이 독창성이 깃들어 있고, 촘촘하게 구성되어 청중들에겐 감상의 몰입을 선사하는 걸작이다.

30개의 변주는 3개씩 묶어 10개의 그룹으로 구성되는데 내부적으론 공통의 질서를 갖고 있어 흥미롭다. 첫 곡에선 다양한 장르(파스피에/지그/푸가 등)의 작곡기법을 아우르고, 두 번째 곡에선 손가락의 화려한 연주기교를 뽐내며, 세 번째 곡에선 엄격한 돌림노래 형식인 카논이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카논은 또 3배수의 숫자에 연결되는데, 3번 변주에선 1도 음정 간격의 모방, 6번 변주에선 2도 간격, 9번 변주에선 3도 간격 등 카논 차례가 올 때마다 한 계단씩 올라가며 돌림노래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학생에게 이 음악을 용기 내어 추천했었다. 이틀 후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땐 괜히 불면을 부추긴 건 아닌가 싶어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 학생의 감상방식은 내 불안의 허를 찔렀다. 30개의 파란만장한 변주는 건너뛰고, 처음과 끝 명상적인 아리아만 추려 들어 심리적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불면을 물리치는 바흐의 음악, 조금씩 확장되어 효험을 발휘하길 기원한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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