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엄마들의 해방 아닐까요?" 안방 울린 '미정 엄마'

입력
2022.05.30 04:30
수정
2022.05.30 19:19
20면
0 0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삼남매 엄마 이경성
"엄마의 해방이 가족 해방의 밑거름"
인공관절 묻는 극중 아들 얘기하며 눈물
"희망은 늘 절망의 맨 밑바닥에 숨어 있어"
오영수·손숙과 국립극단서 함께 활동
"김밥 말고 보험회사 다니며" 연기 병행
내달 '툇마루가 있는 집'으로 다시 무대로

편집자주

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29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종방 전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이경성은 "내가 죽은 뒤 남편(천호진)이 일찍 재혼했는데, 금실 좋은 부부가 사별하면 한쪽이 일찍 짝을 찾는다더라"며 웃었다. 김하겸 인턴기자

29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종방 전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이경성은 "내가 죽은 뒤 남편(천호진)이 일찍 재혼했는데, 금실 좋은 부부가 사별하면 한쪽이 일찍 짝을 찾는다더라"며 웃었다. 김하겸 인턴기자

'엄마'가 죽었다. 가스 불에 쌀을 안친 뒤였다. 엄마는 잠시 쉬러 방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아 진짜, 밥 다 탔어. 어? 밥 다 탔다니... 엄마?" 아들이 안방으로 걸어가며 내놓은 불평은 순식간에 비탄으로 바뀌었다. 큰딸은 갑자기 눈을 감은 엄마를 두고 "분명 과로사"라고 단언했다.


"365일 빨간날이 없어" 갑작스러운 사망일지

29일 종방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혜숙(이경성)은 늘 고단했다. 밭에서 대파를 뽑고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남편(천호진)과 자식들(이엘·이민기·김지원) 밥을 챙기느라 집에 수십 번을 들락거리며 가스 불을 켜고 껐다. "당신은 숟가락 딱 놓고 밭으로 공장으로 가면 그만이지, 나는 365일 빨간날이 없어." 혜숙은 가족에게 속박돼 해방이 시급한 우리네 어머니의 자화상이다. 가족에 반평생을 갇혀 산 혜숙이 21일 방송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엄마는 죽어야 해방된다. 이 드라마의 현실성이 가슴을 후벼판다' 등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갑자기 왜 죽은 거냐고 카톡이 쏟아지더라고요. '이제 해방됐다'고 했죠. 어른들이 그런 말씀 많이 하시잖아요, 죽어야 끝난다고. 엄마들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아요. 저도 애 둘 키우면서 일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어질러져 있으면 어떨 땐 진짜 헛웃음이 나왔거든요. 촬영하는데 밥상이 너무 잘 차려져 있는 거예요. 밥상을 네 번 차린 적도 있고요. 그래서 '감독님, 이 엄마 일하면서 어떻게 이런 이 밥상을 차릴까요'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2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본보와 만난 이경성(58)의 말이다. 그는 "존재감 없이 살아온 엄마가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크게 발휘된 게 아이러니"라고 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혜숙이 밭에서 대파를 뽑아 다듬고 있다. SLL 제공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혜숙이 밭에서 대파를 뽑아 다듬고 있다. SLL 제공


엄마의 인공관절로 '기념식수'

혜숙이 죽은 뒤 아들 창희(이민기)는 집 뒷산에 엄마의 무릎 인공관절을 묻는다. 화장 후 남은 엄마의 고달팠던 삶의 흔적이다. 창희는 장례 기간 그의 옆을 지킨 친구 현아(전혜진)에게 화장터에서 "결혼하자"고 청혼한다. 혜숙이 떠난 뒤 그의 자식들은 경기 산포를 떠나 서울로 갔고, 남편은 밭을 팔고 공장을 닫은 뒤 재혼한다. "혜숙의 죽음이 엄마만의 해방이 아니라 가족 해방의 밑거름이 됐잖아요. 남편이 너무 빨리 재혼해 처음엔 그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남편이 빨리 재혼해야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시골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경성은 극중 아들인 창희 얘기를 하며 눈물을 떨궜다. 13회에서 시장에서 장을 보다 딸인 미정의 결별 소식을 뒤늦게 듣고 골목길에서 우는 엄마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 중 하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왼쪽)가 누워 있는 엄마 혜숙(이경성)을 흔들며 깨우려 하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왼쪽)가 누워 있는 엄마 혜숙(이경성)을 흔들며 깨우려 하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한석규와 대학 동기였던 '대학로 유망주'

이경성의 드라마 외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해방일지' 제작 관계자가 지난해 4월 이경성이 나온 연극 '구멍'을 본 뒤, 그를 드라마에 캐스팅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한석규와 동기인 이경성은 대학로의 유망주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뒤 1987년 국립극단에 입단해 7년여를 단원으로 무대에 올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한국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탄 오영수와 손숙 등과 함께 활동하던 때였다. 이경성은 "제가 그때 국립극단 막내였다"며 웃었다. "'맹진사댁 경사'에서 주인공 이쁜이 역에 캐스팅돼 연습을 했는데, 뛰는 장면이 있었어요. 백성희 선생님이 '너 임신했는데 영 불안하다'고 다음 기회를 보자고 해서 하차했죠. 제겐 경사였는데 기회를 놓쳐 많이 울었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혜숙이 골목을 걸으며 울고 있다. 딸 미정(김지원)이 결별 후 동네에서 울면서 다녔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난 뒤다.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혜숙이 골목을 걸으며 울고 있다. 딸 미정(김지원)이 결별 후 동네에서 울면서 다녔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난 뒤다. JTBC 방송 캡처


"김밥 말며 연기" 남편 떠난 뒤 찾아온 기적

1986년 극단 광장의 연극 '어두워질 때까지'로 데뷔한 이경성은 올해 36년 차 배우다. 대학로에서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여느 연극배우처럼 그도 "김밥집에서 김밥을 말며"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이경성은 "맞벌이였는데 아이들이 커 한창 공부할 때 학원비를 마련하느라 보험회사에 취직도 했다"며 "회사 출근길에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갈아타려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드라마에선 늘 그늘졌던 배우는 웃음이 많았다. 이경성의 요즘 취미는 "합창"이다. 4년여 전부터는 사투리 연구 모임도 하고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밭일을 하느라 목늘어 난 면 티에 '몸뻬바지'만 입었던 이경성은 27일 빨간색 셔츠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의 벤치에서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 김하겸 인턴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밭일을 하느라 목늘어 난 면 티에 '몸뻬바지'만 입었던 이경성은 27일 빨간색 셔츠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의 벤치에서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 김하겸 인턴기자

인터뷰를 마친 이경성은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6월24일~7월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습실로 향했다. 오래전에 살던 집이 허물어지기 전, 관련 인물들이 옛일을 떠올리며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경성은 주인공 남자의 과거 엄마와 현 아내,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밀양연극제에서 세트도 만들었는데 코로나로 공연 일주일 전에 취소돼 1년 동안 묵힌 뒤 이제서야 개막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2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든든한 지원군이었죠. '나의 해방일지'도 제일 좋아했을 사람인데...'희망은 늘 절망의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는 카톡을 지인이 보내줬어요. 힘들 때 '나의 해방일지'를 만났는데 우연은 없는 것 같아요."

양승준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