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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럴 수 있어" 생애 첫 심부름에 나선 어린이들에게

입력
2022.05.28 10: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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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넷플릭스 '나의 첫 심부름'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나의 첫 심부름'은 난생처음 혼자서 심부름을 하러 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담은 일본의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나의 첫 심부름'은 난생처음 혼자서 심부름을 하러 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담은 일본의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넷플릭스 제공

어릴 때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욕심도 샘도 많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였기에, 심부름이라는 미션의 완수와 동반되는 칭찬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어른의 부탁을 받아 무언가를 해내는 여정이 즐거웠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녀오는 길이었음에도 여정이라고 쓰는 이유는, 어린 나에게 심부름이 늘 모험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익숙한 길을 가더라도 타인의 믿음과 완수할 책임을 안고 떠나는 한, 그 길은 내게 모험의 여정이었다. 어른들은 대체로 심부름하는 어린이를 기특해하며 가벼운 칭찬을 던졌고, 나는 그 칭찬으로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분식집을 했던 엄마가 오후에 쓸 떡볶이 떡을 머리에 이고서도, 아빠의 저녁이 될 순댓국을 냄비에 담아 들고서도 씩씩하게 부지런히 걸었다. 엄마와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잘했다고, 우리 딸이 최고라고 말해줄 테니까.

갑자기 어린 시절 심부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넷플릭스의 '나의 첫 심부름' 때문이다. 3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장수 예능 프로그램으로, 지난 5월 초부터 토요일마다 공개되고 있다. 인생의 첫 심부름을 하게 된 아이들을 관찰하는 단순한 형식에 회당 10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짧지만, 어린이들의 심부름 여정이 모험이 될 때 '나의 첫 심부름'은 리얼리티 로드무비가 된다. 흥미롭고 기승전결이 살아있는 이야기인 것은 물론이다.


생애 첫 심부름에 나선 소타는 계속되는 난관에 부닥친다. 넷플릭스 제공

생애 첫 심부름에 나선 소타는 계속되는 난관에 부닥친다. 넷플릭스 제공

홋카이도의 작은 언덕 마을을 배경으로 한 8화를 보자. 세상에 태어난 지 5년 2개월. 우리 나이로 여섯 살인 소타의 첫 심부름이 시작된다. 원래라면 나이와 수준에 걸맞은 심부름을 정해주지만, 아들의 첫 심부름에 고무된 소타의 아빠가 밤낚시에서 생선을 잡아 오면서 일이 커진다. 여기까지가 발단이다. 소타는 아빠가 잡아온 볼락과 쥐노래미, 우럭을 가지고 생선 가게까지 가서 회를 떠와야 한다. 그 다음에는 마트에 들러 아직 아기인 동생의 이유식을 만들기 위한 사과와 분유를 사야 한다. 집이 언덕 위에 있다 보니, 소타가 오르락내리락 길을 오가야 하는 것이 이 미션의 장애물이다. 게다가 아빠가 잡아 온 생선은 어찌나 무섭고 이상하게 생겼는지! 소타는 물고기를 만질 수도 없지만, 어떻게든 작은 아이스박스에 포장해 끈으로 어깨에 둘러메고 길을 떠난다. 이야기가 전개됐다.

일단 내리막이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소타. 집에서 별로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끈이 끊어진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오는 법. 바닥에 널브러진 생선들과 얼음 앞에 망연자실해지는 소타를 보며, 보는 나도 마음이 무너진다. 여섯 살 어린이가 어떻게 저 위기를 헤쳐 나간단 말인가. 소타는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부탁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가 나타나서 생선을 노린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저 멀리 아파트에서 자신을 지켜보며 혼자 해결해보라는 엄마의 말에, 소타는 결국 미끌미끌한 생선을 잡아 들어 박스에 넣는다. 동네 어르신에게 끈을 다시 묶어달라는 부탁도 한다. 야속하게도 끈은 생선 가게 근처에서 한 번 더 끊어지지만, 한 번 해본 일이니 두렵지 않다. 양손으로 박스를 안아 들고 온 소타를 칭찬하며 회를 떠 준 생선 가게 사장님들 덕분에, 첫 미션은 성공이다. 하지만 분유와 사과를 사는 과정에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엄마가 부탁한 사이즈보다 더 큰 분유를 사서 어깨가 무거워진 소타는,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 길에서 자꾸 물건이 담긴 봉지를 놓친다. 그럴 때마다 사과는 내리막길로 떼굴떼굴 굴러떨어진다. '나라면 포기했어.' 보는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데도, 어린 소타는 다시 내려간다. 사과를 집어 들고 또 올라온다. 그리고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한 번 더 봉지를 놓친다. 울상을 하고도 다시 사과를 가지러 내려가는 소타 앞에 나타난 건, 스태프가 아닌 평범한 아저씨다. 소타를 보고 차에서 내려 사과가 더 멀리까지 굴러가지 않도록 받아준 것이다. 타인의 도움으로 심부름을 완수하는, 여기가 절정이다. 결말은 소타가 무사히 돌아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나는 최근 그 어떤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도 이 20분짜리 심부름보다 완벽한 이야기를 만난 적이 없다.


'나의 첫 심부름' 속 어린이들은 누군가의 작은 응원과 도움으로 계속해나갈 용기를 얻는다.

'나의 첫 심부름' 속 어린이들은 누군가의 작은 응원과 도움으로 계속해나갈 용기를 얻는다.

비단 소타만이 아니다. '나의 첫 심부름' 속 어린이들은 때로 울고, 겁내고, 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포기하려고 하다가도, 누군가의 작은 응원과 도움이 찾아올 때마다 계속해나갈 용기를 얻는다. 어린 나에게 책임과 역할을 맡긴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 용기를 행동으로 바꾼다. 더 큰 목소리로 질문하고, 한 걸음 더 걷는다. 그렇게 '나의 첫 심부름' 역시 가볍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나의 첫 심부름'은 모든 어린이에게 '집 밖의 어른'인 우리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그건 바로 어린이를 환대하는 어른, 어린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른, 어린이의 크고 작은 성취를 기꺼이 칭찬하고, 어린이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 모두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어른이다. 어린이를 위한 자리를 준비해두고, 어린이의 출입을 막지 않으며,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어린이가 사회의 일원이 되는 일을 돕는 어른이다. 그런 어른을 우리는 공동체를 위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이라고 부른다.

온 가족이 모였던 지난 어버이날, 전골을 끓이는 가스버너의 가스가 떨어지자 언니가 큰아들, 나의 큰조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 나이로 열 살이 되었으므로 첫 심부름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조카가 돌아오지 않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언니가 조카를 찾으러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아들이 다정히 손을 잡고 돌아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넘칠 만큼 활달했던 조카는 열 살이 되면서 쑥스러운 감정을 알게 됐다. 큰 마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봤지만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한 조카는, 그래도 나름 용기를 내어 직원에게 위치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조카의 목소리가 작았던 탓인지 직원이 바빴던 탓인지 층수와 대강의 위치만을 알려주었다는데, 거기에는 찾는 물건이 없더란다. 한 번 더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하며 서 있는데, 엄마가 마법처럼 나타난 것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면서.


'나의 첫 심부름'은 모든 어린이에게 '집 밖의 어른'인 우리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넷플릭스 제공

'나의 첫 심부름'은 모든 어린이에게 '집 밖의 어른'인 우리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넷플릭스 제공

그때는 아직 '나의 첫 심부름'을 보기 전이었으니 몰랐지만, 이제는 조카의 마음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조금은 안다. '나의 첫 심부름'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조카는 엄마를 돕는 일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겠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필요한 물건을 아무래도 찾지 못할 것 같자, 부풀어 올랐던 마음의 바람이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쪼그라든 마음으로 조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족 행사를 위해 스님을 부르러 갔던 12화의 사에가 마주한 캄캄한 불당 안처럼, 마트의 환한 불빛이 다 꺼진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끼워준 팔찌마저 끊어지고 의지할 사람 한 명이 없는 자리에 한참을 서 있던 사에는, 얼굴의 땀과 눈물을 닦아낸 뒤 큰 소리로 묻는다. "계세요?" 조카도 그렇게 용기를 냈을 것이다. 쑥스럽지만, 어색하지만, 조금 겁이 나기도 하지만, 물어봤을 것이다. 사에는 무사히 스님을 모시고 돌아왔다. 하지만 조카는 용기를 냈는데도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카의 심부름은 실패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그럴 수 있다.

실은 나 역시 심부름을 실패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순댓국 냄비를 들고 급히 걷던 나는 서두르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흥건하던 국물과 울음을 터뜨려버린 나, 기억은 거기서 끝난다. 하지만 조카의 경험과 이어 붙여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 어린 나는 다시 냄비를 들고, 집을 향해 걷는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 딸이 최고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다. 나는 어렴풋이, 살면서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른인 나는 그래야 한다고, 그게 우리 모두에게 더 필요한 말이라고 믿는다. 이 지면을 빌려 조카에게 "좀 더 큰 소리로 말하지 그랬어"라는 조언 대신,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용기를 낸다는 것이므로 용기를 낸 네가 자랑스럽다고. 수고했고, 모두 괜찮다고. 세상에는 네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너무 바쁜 어른들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너와 너의 동생, 그리고 모든 어린이의 시도를, 실패와 성공을, 모험을, 심부름보다 더 길어질 삶의 여정마다 내디딜 발걸음을, 진심으로 응원해.

윤이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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