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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사과한 '약촌오거리' 사건... 징역 15년 당시 판결문은 고작 4쪽

입력
2022.01.07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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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검사 사과해 주목받은 '약촌오거리 사건'
범인 몰린 최씨에게 중형 선고한 판결문 보니
잘못된 수사한 검찰과 경찰 주장 그대로 원용
증거 없는데 결백 호소에도 "반성 안해" 치부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모두 자백하고서도 이 법정에 이르러 범행을 부인하는 등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망인을 잃은 유족에게 또다시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징역 15년에 처함."

사건번호 2000고합127 판결문

2002년 2월 2일 오전, 전주지법 군산지원 201호 법정에 선 16세 소년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혐의는 살인과 무면허운전. 소년은 재판 내내 "내가 한 일이 아니다"고 호소했지만, 재판부는 되레 "수사기관에서와 달리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으로 누명을 쓴 최모(36)씨의 억울한 옥살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약촌오거리 사건 진범을 조사해놓고도 무혐의 처분한 김훈영 검사가 최씨를 직접 찾아가 사과하면서, 수사를 잘못한 검찰과 경찰은 물론 '엉터리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향해서도 쓴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법조계에선 특히 직접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백을 주장하던 최씨 진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점을 문제로 보고 있다.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최모씨가 2016년 11월 17일 오전 광주고법 앞에서 선고 받은 뒤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광주=뉴스1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최모씨가 2016년 11월 17일 오전 광주고법 앞에서 선고 받은 뒤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광주=뉴스1


결백 주장에도 8회만 진행된 공판... 판결문은 네쪽

6일 법원에 따르면 전주지법 군산지원 제1형사부가 최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며 작성한 판결문은 4쪽 분량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2000년 8월 10일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최씨는 피해자인 택시기사 A씨로부터 운전을 똑바로 하라는 욕설을 듣게 되자, 흉기로 A씨를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는 내용을 법원이 인정하는 범죄사실로 정리했다. 양형 이유로는 △범행수법이 잔인하고 △범행 후 죄적을 은폐하려고 했으며 △수사기관에서와 달리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했다.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사건임에도 '증거 요지'는 A씨 부인 및 동료 택시 운전기사와 응급차 운전기사 등의 진술, 피의자 신문조서, 사망진단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사체부검의뢰회보서 등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진술 내용은 "피해자가 택시 운전석에서 배를 움켜잡고 있는 것을 봤다" "평소 최씨가 소란을 많이 피웠다" 등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최씨가 입었던 옷이나 신발에서 혈흔이 발견됐다는 등의 직접 증거는 없었다. 최씨는 "경찰의 폭행에 거짓 자백했다"고 호소했지만, 재판부는 몇 가지 정황 증거만을 근거로 "사소한 시비 끝에 특별한 동기 없이 무고한 생명을 살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고기일을 포함해 단 8번의 공판을 거쳐 나온 결과였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최씨는 2001년 5월 항소심에서 "감형이라도 받자"는 국선 변호사 말에 결국 있지도 않은 혐의를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 상고도 포기해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재심 재판부 "원심 판단에 사용된 진술 범행 증명 못해"

2016년 9월 22일 광주고법에서 열린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 증언을 위해 법정에 나온 피해자 최모(오른쪽)씨와 진범을 잡는 데 도움을 준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강력반장이 만나 두 손을 꼭 잡고 활짝 웃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 제공

2016년 9월 22일 광주고법에서 열린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 증언을 위해 법정에 나온 피해자 최모(오른쪽)씨와 진범을 잡는 데 도움을 준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강력반장이 만나 두 손을 꼭 잡고 활짝 웃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 제공

하지만 사건 발생 15년 만에 열린 재심에선 이전에 유죄 판단의 근거로 사용된 증거들이 조목조목 비판을 받았다. 광주고법 제1형사부는 2016년 11월 17일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현장 목격자 진술은 누군가의 범행으로 A씨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최씨가 A씨를 살해했다는 점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씨가 일하던 다방 직원의 흉기에 대한 진술도 최씨의 범행을 증명할 수 없으며 △A씨의 택시나 최씨 옷에서 아무런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무죄 판단의 이유로 제시됐다.

최씨는 지난해 8월 자신을 직접 찾아와 사과한 김훈영 검사에게 위로를 받아 그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을 취하했다. 지난달 15일 서울고법 민사20-3부 심리로 열린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 3차 변론에서, 재판부는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판사는 기록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 판사들도 마음이 무겁다"고 밝혔다.

재심 사건을 맡아 최씨를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는 "비난이 너무 길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당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재판부는 냉정하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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