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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힘든 '미투' 빙상 선수는 왜 두 번 했을까 [일그러진 스포츠]

입력
2021.12.21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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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끝나지 않은 싸움 '스포츠 미투'
폭로 후 대한체육회·빙상연맹은 뒷짐
국회의원은 "예쁘니 방송 나가라" 말도
가해자 지목된 코치 재취업 시도 소식
"가만히 있다간 바보 되겠다" 직접 고소
경찰 기소의견 송치 "4년째 정신과 치료"

한국일보를 통해 두번 째 '미투'를 선언한 하지영(21·가명)씨. 하 씨는 2019년 1월 코치의 인권침해 행위를 CNN 등 언론에 알린 바 있다. 배우한 기자

한국일보를 통해 두번 째 '미투'를 선언한 하지영(21·가명)씨. 하 씨는 2019년 1월 코치의 인권침해 행위를 CNN 등 언론에 알린 바 있다. 배우한 기자

빙상 선수를 그만둔 대학생 하지영(21·가명)씨는 손톱에 분홍빛 칠을 했다. 언뜻 보면 화려해 보였지만, 손톱 끝자락 살은 보기 흉하게 해져 있었다. 하씨는 “불안하니까 자꾸 뜯게 된다”고 했다. 손목엔 3㎝ 정도 되는 흉터도 보였다. 자해를 시도했다가 꿰맨 자국이었다. 그는 한국일보에 “코치였던 박상진(가명)씨가 내 인생에 들어온 뒤 우울증이 생겼다”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2019년 1월 코치의 성추행과 폭행 등 인권침해 행위를 언론에 알렸던 빙상 선수가 한국일보를 통해 재차 '미투'를 선언했다. 폭로 이후에도 대한체육회나 빙상연맹, 그리고 수사기관은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변에선 하씨가 도움의 손길을 피하고 숨어버렸다고 치부하기도 했다. 그 사이 가해자로 지목된 박씨는 징계는커녕 지도자 생활을 위해 재취업을 시도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하씨는 “2019년 ‘빙상계 미투’가 터지면서 주변 권유로 언론 인터뷰를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수사기관 문을 두드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하씨가 지난 4월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한 이유다. 이 사건은 현재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상태다.

“가만히 있다가는 바보 되겠구나 싶었다”

2019년 초 하씨가 ‘1차 미투’를 통해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자신이 박씨를 직접 고소하기 전까지 사건은 2년 넘게 묻혀 있었다. 당국 조사가 아예 없진 않았다. 검찰은 당시 교육부로부터 사건을 이첩받아 내사했지만, 하씨가 조사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각하 처분했다.

하씨가 받은 충격은 또 있었다. 박씨가 지난해 12월 서울시청 빙상팀 지도자 모집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씨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대한체육회는 물론 빙상연맹 징계도 받지 않은 채 빙판에 돌아오려고 시도했던 셈이었다. 하씨는 “가만히 있다가는 나만 바보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고소를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해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씨는 “1차 미투로 언론 인터뷰를 할 때처럼, 혼자 나가서 또 조사받고,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게 정말 무서웠다. 경찰에서 진술할 때도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운 적이 많았다.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고 말했다.

2년 전 떠밀리듯 미투, 연맹 보호? “기대도 안 해”

2년 전 미투 당시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은 하씨가 형사고소를 망설이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씨는 당시 폭로할 마음의 준비가 덜 됐지만, 주변에 있던 선배들이 강하게 '미투'를 권유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습니다. 심석희 선수도 미투를 했고 목소리 내는 선수가 많으니 동참하라고 설득했어요. 고민 끝에 응했지요.”

그러나 고작 19세 나이에 미투에 따른 심적 부담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 씨는 “CNN을 포함해서 언론 인터뷰를 3개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성추행 피해를 계속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했다. 인터뷰를 주선한 선배들에게 힘들다고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스케줄이 계속 잡혔다”고 전했다. 미투 폭로 이후 체육회와 빙상연맹에서 심리상담 등을 도와주려는 움직임은 없었냐고 묻자, 하씨는 “기대도 안 했다”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정치인들도 당시 그의 마음을 감싸주지 못했다. 어떤 국회의원은 하씨를 찾아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하씨는 “그분이 ‘예쁘게 생겼으니 얼굴 노출하고 방송 나오면 좋을 것 같다. 스케이트도 다시 시작해라. 앞으로 뭐 먹고살 거냐’라고 했다”며 어이없어했다.

가혹행위 장기간 반복… 코치는 혐의 부인

2년 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씨가 미투 폭로에 나선 것은 박씨의 가혹행위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됐기 때문이다. 하씨는 박씨가 코치로 있던 팀에 들어가기 직전 전국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촉망받는 스피드스케이팅 유망주였다.

그런데 박씨를 만나며 불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하씨의 변호인 의견서 등에 따르면 하씨는 박씨의 사설 강습팀에 들어간 2016년 4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최소 5차례에 걸쳐 성추행과 성희롱, 그리고 폭행을 당했다.

하씨 측은 박씨의 가스라이팅(상황 조작을 통한 심리 지배)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씨는 “박씨가 틈만 나면 ‘넌 국가대표 코치 밑에서 특혜받고 있다’면서 아끼는 듯한 말을 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희 집 가난한데 이런 식으로 할 거냐’며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오래 듣다 보니 정신착란도 왔다”고 말했다. 하씨는 현재 4년 넘게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지난달 26일 경기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열린 '제37회 회장배 전국 남녀 쇼트트랙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사용하던 스케이트가 놓여 있는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성남=이한호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열린 '제37회 회장배 전국 남녀 쇼트트랙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사용하던 스케이트가 놓여 있는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성남=이한호 기자

박씨가 속한 팀에서 빠져나올 순 없었을까. 하씨는 그저 버텼다고 했다. 그는 “엄마가 새벽까지 일하며 나를 뒷바라지했다. 코치한테 ‘성의 표시(돈 상납)’ 할 형편도 못 됐다. 내가 잘 안 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견뎠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는 하씨가 주장하는 성추행과 폭행 혐의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경찰로부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다는 문서는 받았지만, 하씨를 성추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폭행 혐의와 관련해서도 "그런 적이 없는데, 하씨의 고소 때문에 혐의가 인정돼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소속팀 없이 빙상 개인 강습 등을 하고 있다.

윤현종 기자
조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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