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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왔던 아프리카, 그들이 무국적자가 된 이유

입력
2021.10.26 14:0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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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식민지 시대에 갇힌 케냐
'무 자르듯' 국경 그은 서구열강 분할통치
독립 후 종족·종교·영역 갈등으로 비화
전후 국적법은 소수민족 고려 없이 제정
힘 없는 종족들 무더기로 무국적자 전락

편집자주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들, 무국적자다. 전 세계 무국적자는 300만 명, 그 중 3분의 1은 아이들로 추산된다. 무국적 문제는 보편 인권에 바탕해야 할 인간사회의 심각한 허점이자 명백한 인재(人災)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다.


케냐 일대 아프리카 국경과 옛 식민통치국. 그래픽=송정근 기자

케냐 일대 아프리카 국경과 옛 식민통치국. 그래픽=송정근 기자

"초원의 야생동물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데, 우리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케냐 펨바족 므왈리무 음카샤(46)씨는 무국적자의 처지를 나이로비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에 빗대 설명했다. 무국적자는 교육, 의료 등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 서비스에도 접근하기 쉽지 않다. 케냐의 기술력과 행정력이 발달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국민 통합 관리에 나서고 있지만, 애초에 신분증과 출생증명서가 없는 이들은 구제받지 못한다. 음카샤씨는 "케냐 정부가 국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후두마 넘버'(한국의 주민등록번호)를 온라인으로 발급하기 시작했지만, 본인 인증을 할 수 없는 무국적자는 신청조차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아프리카 무국적자 문제는 식민 지배 역사의 상흔이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은 광활한 대륙에 칼로 무 자르듯 국경을 긋고 분할 통치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이 인위적 국경을 기준으로 독립국이 탄생했고,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적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식민통치국을 모방한 법이 채택됐다. 수천여 부족이 자유롭게 오가며 공존하던 대지에 정통성이 불분명한 54개국이 세워지면서, 이곳 사람들은 종족·종교·영역 등을 두고 갈등과 차별의 수렁에 빠졌다.

힘이 약한 소수 부족들은 소외를 피하지 못했고, 케냐 역시 마찬가지였다. 펨바족의 경우 대대로 모여살던 지역이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으로 분할되면서 케냐 출신들은 무국적자로 전락했다. 쇼나족이나 아시아·르완다계 후손은 선교나 일자리를 위해 케냐로 왔다가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변유진 유엔난민기구(UNHCR) 케냐 공보관은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제정한 국적법이 소수민족을 아우르지 못해 무국적 문제가 발생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마콘데족처럼 중앙정부와 지리적으로 먼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은 시민권을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삼웰 오쿠테 유엔난민고등판무관보는 "케냐는 1963년 독립하면서 2년 동안 시민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기간을 놓쳐 케냐 국민임을 증명할 방법을 잃은 것"이라고 부연했다.

무국적자 신분이었던 케냐의 소수부족 마콘데족이 2016년 10월 콸레주에서 수도 나이로비까지 500㎞ 거리를 행진하며 정부를 상대로 시민권을 인정해달라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케냐 인권위원회

무국적자 신분이었던 케냐의 소수부족 마콘데족이 2016년 10월 콸레주에서 수도 나이로비까지 500㎞ 거리를 행진하며 정부를 상대로 시민권을 인정해달라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케냐 인권위원회

마콘데족은 2016년 주 거주 지역인 콸레주에서 수도 나이로비까지 500㎞를 행진하며 시위한 끝에 뒤늦게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행진의 시작은 마콘데족 300명이었지만 나이로비에 도착할 무렵에는 국내 인권운동가들과 펨바족 등 다른 무국적자들까지 총 2,000명이 넘는 인원이 합세했다.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은 과거 정부를 대신해 시민권 문제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해 10월 마콘데족은 케냐의 43번째 부족으로 인정받았고 1,496명이 시민권을 획득했다. 쇼나족 또한 지속적 요구를 통해 지난해 12월 시민권을 받았다. 하지만 케냐에는 아직도 수만 명의 무국적자가 있다.

케냐 정부가 무국적자 구제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로 재정 문제도 거론된다. 케냐는 인접국 소말리아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을 53만 명가량 수용하고 있는데, 국가 경제력을 감안할 때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다. 케냐가 유엔의 '무국적자 지위에 관한 협약'(1954년), '무국적자 감소에 관한 협약'(1961년)에 모두 서명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케냐 내무부의 무국적자 태스크포스(TF) 대표인 유니스 람바 차차는 "케냐인조차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지만, 법 개정 등으로 무국적자 문제를 해소하고자 노력해왔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당사국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에드윈 아부야 나이로비대 법학과 교수는 "무국적자 문제를 널리 공론화하고 각국 정부가 의지를 갖고 관련 협약에 가입하는 과정을 거쳐야 문제 종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이아나 기센고 국제앰네스티 인권변호사는 "국적법 개정은 세계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는 만큼 정치적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라면서 "무국적자 문제가 식민통치국의 점령과 법에 의해 생긴 만큼 그들도 역사적으로 해를 끼친 것을 인정하고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나이로비(케냐)= 이유지 기자
영상제작= 현유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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