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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들이 때때로 악보 펼치지 않는 이유

입력
2021.09.08 0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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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지난달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여름음악축제에서 이승원 지휘자가 악보 없이 단원들을 지휘하며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달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여름음악축제에서 이승원 지휘자가 악보 없이 단원들을 지휘하며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공연 중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지휘자 앞에도 악보는 놓여 있다. 악보에는 어떻게 지휘할지가 적혀 있을까? 우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각자의 '파트보'를 본다. 자신이 연주해야 하는 악기의 악보다. 그렇다면 지휘자가 보는 것은? 바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파트가 쓰여 있는 '총보(Score)'다. 책 한 권 두께다. 작품 연주에 필요한 모든 데이터가 방대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지휘자는 총보를 통해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악기별 세부 연주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오직 지휘자 머릿속에 저장된 악보로 지휘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암보(악보를 외워 기억함)'다. 지난달 KBS교향악단 정기공연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암보로 지휘했고, 예술의전당 여름음악축제에서 이승원 지휘자가 말러 교향곡 1번을 암보로 공연했다.

지난달 지휘자 정명훈(가운데)이 KBS교향악단과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단원들과 리허설을 하고 있다. 정명훈은 실제 공연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암보로 지휘했다. KBS교향악단 제공

지난달 지휘자 정명훈(가운데)이 KBS교향악단과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단원들과 리허설을 하고 있다. 정명훈은 실제 공연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암보로 지휘했다. KBS교향악단 제공

이번 달 17일 KBS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은 요엘 레비 역시 암보를 잘하는 지휘자로 유명하다. 그는 2019년까지 KBS교향악단을 이끌었으며, 취임 후 6년 동안 단 한 번도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해,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암보의 왕'으로도 불렸다. 그는 작곡가 쇤베르크의 초대형 작품 '구레의 노래'마저 악보 없이 지휘했다. '구레의 노래'는 솔리스트들과 합창단 파트를 포함해 무려 300여 명의 출연진이 동원된다.

암보로 지휘하는 지휘자들을 보며 관객들은 궁금해한다. 대체 책 한 권의 데이터를 인간이 모두 외우는 게 가능할까? 그러면서 감탄한다. '아, 저 지휘자는 작품을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지휘를 한다면 더군다나. 하지만 암보를 지휘자의 단순한 퍼포먼스 차원으로 일축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암보란 원주율 π를 소수점 100번째 자리까지 외워 나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3.141592... 굳이 악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행위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암보는 장점이 많다. 가장 큰 이점은 악보라는 중간매개체 없이 단원들과 즉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난달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던 이승원 지휘자는 "200페이지가 넘는 악보를 두고 지휘를 한다면, 그만큼 일일이 넘겨가며 지휘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결국 무대에서 단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암보를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정나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지휘자도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암보를 하게 되면 무대 위에서 눈이 자유로워진다. 악보를 보고 지휘를 하게 되면, 눈이 계속 악보에 머무를 때가 있는데, 단원들과 음악적인 소통이 어려워지기도 하고, 음악의 전체적인 맥락을 놓칠 수도 있다."

악보를 보면서 공연할 때도 장점은 많다. 두 지휘자 모두 정확성과 안정성을 꼽았다. 앙상블(조화)이 안 맞는 대목에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으며, 신경 쓰지 못했던 성부들도 악보를 통해 발견된다. 또 무대에서 악보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도 있다. 덧붙여 이 지휘자는 "협주곡의 경우 협연자에게 신뢰를 심어 주기 위해 악보를 두기도 한다"고 전했다.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당신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취지다.

결국 암보는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이다. 악보를 놓고 지휘한다 해도 지휘자가 악보를 처음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완성도 높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외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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