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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봉기→반미→반일'...윤석열이 꺼낸 '죽창'의 변천사

입력
2021.07.03 17:30
수정
2021.07.0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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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기도, 만들기도 쉬운 '민중의 무기'
2000년대 초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등
죽창 등장하며 '반미 운동' 상징되기도
일본 무역제재 당시 조국 '죽창가' 언급에
'반일 정서' 또는 '대일 강경 외교' 대변하게 돼

한일관계가 이념 편향적 죽창가를 부르다가 회복이 불가능해질 정도까지 망가졌다.

지난달 29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발언

전북 정읍시 동학혁명기념관 야외에 설치된 부조는 죽창을 들고 봉기한 농민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북 정읍시 동학혁명기념관 야외에 설치된 부조는 죽창을 들고 봉기한 농민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한일관계 개선 방안'을 묻는 일본 NHK 기자의 질문에 내놓은 답변입니다. 많은 국민들은 '죽창가와 일본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냐'며 의아해했죠.

'죽창가'는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불렸던 민중가요인데요.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고(故) 김남주 시인의 시 '노래'에 화가 김경주씨가 곡을 붙인 겁니다. 가수 안치환씨가 부르면서 더욱 유명해졌죠.

'죽창가' 가사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녁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가를 일본, 정확히 말해 '반일(反日)' 정서 또는 대일 강경 기조와 연결시킨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입니다.

2019년 7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조 전 장관은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화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 음악으로 나왔다"며 죽창가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공유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를 취했을 때라, 조 전 장관의 SNS는 일본을 비판하는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파견된 일본군과도 맞섰다는 점에서 '반일'과 연결되는 것이죠.

즉, 윤 전 총장은 조 전 장관의 죽창가 용례를 차용해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죽창의 메타포 ①: 아래로부터의 혁명

2003년 12월 박순호 원광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죽창 4개와 무쇠창끝 1개를 최근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했다며 언론에 공개했다. 군산=연합뉴스

2003년 12월 박순호 원광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죽창 4개와 무쇠창끝 1개를 최근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했다며 언론에 공개했다. 군산=연합뉴스

죽창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창'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죽창은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 창이었는데요. 무게가 가볍고 비용도 적게 들어서 많은 병사들을 무장시키기 쉬웠다고 합니다.

죽창은 재료를 구하기도, 만들기도 쉬워서 오래전부터 '민중의 무기'로 사용됐습니다. 죽창가의 배경 사건인 동학농민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전북 정읍 동학혁명기념관엔 죽창을 든 농민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죠.

▶ [손호철의 발자국] 자주와 개혁, 민중의 꿈을 담은 동학농민혁명

죽창의 메타포 ②: 반미(反美)

2006년 6월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을 피해 경기 평택 대추리 부근 철조망 지역까지 진입하자 군인들이 죽창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6년 6월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을 피해 경기 평택 대추리 부근 철조망 지역까지 진입하자 군인들이 죽창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주화 운동 등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상징하던 죽창은, 2000년대 들어 '반미(反美)'라는 메타포를 얻습니다. 2006년의 경기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등에 죽창이 등장하면서입니다.

2004년 한국과 미국이 용산 미군기지와 2보병사단을 평택으로 이전하는 협정에 합의한 이후 평택 주민 535가구가 터전을 떠나야 했는데요. 국방부의 일방적 토지수용과 보상 정책에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2006년 봄 죽봉(죽창)과 쇠파이프가 등장하는 물리적 충돌이 빚어집니다.

죽창은 또 같은 해 가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던 한미 FTA 반대 시위에도 등장합니다. FTA 시위는 농민에겐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시위 참가자의 절반 이상(58.3%)을 차지했던 농민들은 "FTA가 체결되면 100만 명이 넘는 농업 인구가 길거리로 내몰린다"고 주장했습니다.

'평택 대추리 시위' 60명에 구속영장

▶ 폭력으로 얼룩진 反FTA 시위 "생존 달린 문제" 지도부 통제 못미쳐

죽창의 메타포 ③: 불법 폭력 시위

2009년 10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이인기 의원이 시위에 쓰이는 죽창을 들고 "경찰봉은 이에 비해 턱없이 짧고 방석모도 허술하다"며 시연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9년 10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이인기 의원이 시위에 쓰이는 죽창을 들고 "경찰봉은 이에 비해 턱없이 짧고 방석모도 허술하다"며 시연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앞선 두 사건에서 모두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며 '불법 시위' 논란도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2009년 '죽창=불법 폭력 시위'라는 논쟁적인 이념에 힘이 실리게 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대전에서 열렸던 민주노총 집회 당시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소속 의경이 죽창에 찔려 한쪽 눈이 실명 위기에 놓인 사건입니다.

경찰은 집회 이후 거둬들인 대나무 장대 600여 개 가운데 20여 개의 끝이 날카롭게 잘려 있음을 강조하며 해당 시위 도구를 '죽창'으로 부르겠다고 공식화합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아예 '죽창 시위'로 언급했죠.

민주노총은 이에 "경찰이 '죽창'이라는 선정적 단어를 사용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경찰이 먼저 폭력 진압을 벌였음에도 민주노총의 폭력성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반발했습니다.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언론도 '죽창'과 '죽봉'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검찰은 죽창보다는 흉기의 성격이 덜한 '죽봉'으로, 법원은 '만장깃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하죠. 이념성을 담지 않은, 중립적인 표현을 쓰려는 의도로 풀이됐습니다.

▶ [메아리] 죽창도 죽봉도 아닌

죽창의 메타포 ④: 반일(反日)

조국(왼쪽)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 뉴시스·이한호 기자

조국(왼쪽)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 뉴시스·이한호 기자

죽창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 잠시 모습을 비췄다가, 2년 뒤 정치적 맥락을 입고 재등장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조국 전 장관의 페이스북에서 말이죠.

일본의 무역제재가 2018년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노동자 승소 판결에 보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조 전 장관의 죽창 언급을 속 시원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외교·안보 이슈와는 관계없는 민정수석이 감정적으로 선동하는 글을 올렸다'는 비판도 제기됐고요.

▶ 조국, 연일 일본 비판... 동학농민혁명 소재 '죽창가' 언급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 이후 그의 죽창가 언급을 비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페이스북 계정 캡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 이후 그의 죽창가 언급을 비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페이스북 계정 캡처

윤 전 총장의 죽창가 언급 이후 조 전 장관은 "일본 정부와 유사한 그의 역사의식에 경악한다"고 응수했는데요.

▶죽창가 다시 올린 조국 "윤석열의 역사의식, 日과 유사해 경악"

반일 또는 대일 강경 기조로서의 죽창은 그렇게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 등판하게 됩니다.

윤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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