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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힐링 필요한데… 여행은 사치인가요

입력
2021.05.20 10:10
수정
2021.05.20 11:4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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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기실현: 단 하루를 살아도
장애인 4명 중 3명 "여행 가본 적 없어"
숙소·교통·음식·용변 등 곳곳에 난관
"제주도도 힘든데 해외여행 꿈도 못 꿔"
여행할 권리 보장할 제도적 지원 필요

지난달 21일 서울 성북구에서 장애인 여행 전문 유튜버 함정균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성북구에서 장애인 여행 전문 유튜버 함정균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편집자주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의젓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책적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의 불안한 삶을 지탱하는 건 가족의 안간힘이다. 국내 장애인 규모가 등록된 인원만 해도 262만 명이니, 이들을 돌보는 가족은 못해도 1,000만 명을 헤아릴 터이다. 장애인 가족의 짐을 속히 덜어주는 것만큼 시급한 국가적 과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 하반신 마비 지체장애인 함정균(49)씨는 지난해 10월 전동 휠체어로 서울에서 경기 수원까지 여행하는 도전에 나섰다. 8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장애인 전문 유튜버로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호기롭게 서울 성북구 자택을 출발했지만 한 시간 만에 난관에 봉착했다. 성수대교를 건너다가 휠체어 바퀴가 도로 틈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 행인의 도움을 받아 수시간 만에 탈출했지만, 용변 문제로 탈이 났다. 휠체어로 출입 가능한 건물, 그중에서도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병원 하나를 찾아 들어갔는데, 결국 화장실 문 앞에서 참아왔던 소변이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함씨는 여행을 갈 때마다 늘 여분의 바지를 챙긴다고 한다.

# 경증 지체장애인 이모(32)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생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혼자 침대에 눕기도 힘든 이씨 입장에서 동반자 없이 일주일 넘는 여행에 도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대학생처럼 아르바이트로 수백만 원에 이르는 경비를 모을 수도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친구들 사진을 보며 꿈만 키워온 지 10년. 학교 졸업 후 취직해 금전적 여유가 생긴 이씨는 마음에 품어온 여행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여행 1년 전부터 장애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선배'들의 후기를 참고해 계획을 짜고 예약을 마쳤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수천 번 돌렸다.

2018년 4월 공항에서 휠체어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기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어 14시간 넘는 비행 동안 물도 마시지 않으며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수화물로 부친 전동 휠체어를 기다리느라 한 시간 넘게 대기한 뒤 비싼 장애인용 콜택시를 타고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장애인용 객실을 예약했건만 화장실이 좁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 호텔 측에서 전동과 수동 휠체어를 착각한 것이었다. 이씨는 일주일간 호텔 1층 로비 화장실에서 용변을 봤다. 샤워는 하지도 못했다. 이후 이씨는 예약 전 숙소에 전화해 객실 및 화장실 크기, 복도 폭 등을 '㎝' 단위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장애인 4명 중 3명 "여행 가본 적 없다"

장애인의 여행 경험. 그래픽=송정근 기자

장애인의 여행 경험. 그래픽=송정근 기자

여행은 보통의 사람에게 따분하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당일치기로 동해에 가서 회를 먹기도 하고, 친구들과 휴가를 맞춰 해외에 다녀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여행이 일생에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사치'로 여겨진다. 바로 장애인들의 이야기다.

이는 여러 통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통계청이 발간한 '2020 통계로 보는 장애인의 삶'에 따르면 주말에 여행을 즐긴다고 답한 비장애인은 전체 응답자의 17.2%였지만 장애인은 7.1%에 불과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장애인 삶 패널조사'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전인 2018년 장애인의 국내여행 경험률은 21.3%, 국외여행은 6%에 그쳤다.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온 적 없다고 대답한 비율은 75.1%에 달했다.

"숙소 절반이 장애인 객실 없어"

장애인이 사용하는 전동휠체어가 문턱에 가로막혀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애인이 사용하는 전동휠체어가 문턱에 가로막혀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 '연금술사'의 저자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고 용기의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만난 8명의 장애인은 "장애인이 여행을 가려면 돈과 용기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용기로도 넘을 수 없는 현실 장벽이 있다는 이야기다.

숙소 예약부터가 어렵다. 객실과 화장실 크기가 휠체어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하는데, 장애인 전용 객실을 예약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런 객실이 있는 숙소 자체가 적고, 있더라도 그 수가 매우 적다.

현행법상 30실 이상 일반숙박시설은 보유 객실의 1% 이상, 관광숙박시설은 객실 수와 관계없이 3% 이상을 장애인 전용 객실로 갖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이 전국 숙박업소 100곳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9곳에 장애인용 객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관할 지자체는 이런 건물주에게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미이행 시 벌금을 부과해야 하지만, 보건복지부에 조치 내역을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보니 소관 부처와 지자체 모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이에 장애인은 상대적으로 숙박비가 비싼 대형 콘도나 리조트를 사용하거나 해당 지역 여행을 포기하는 일이 많다.

"장애인에게 '맛집'은 들어갈 수 있는 곳"

서울지하철 시청역 1호선 장애인 화장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지하철 시청역 1호선 장애인 화장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끼니 해결은 장애인의 여행을 가로막는 또 다른 난관이다. 경사로가 설치돼 있지 않거나 내부 통로가 휠체어가 지나가기에 좁은 식당이 많다 보니 장애인 사이에서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음식점이 맛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10대 지체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김모(46)씨는 "아이가 닭갈비를 좋아해 춘천으로 가족여행을 갔는데, 유명한 맛집 대부분은 내부가 비좁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KTX 등 기차역이 없는 소도시는 교통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국토교통부가 2019년부터 진행 중인 '휠체어 탑승 가능 고속버스' 시범사업도 지지부진하다. 대상 노선 4곳 중 당진을 제외한 부산·강릉·전주 노선은 이미 KTX가 있어 이용률이 저조한 데다, 탑승 가능 휠체어 또한 모두 외국산 고가 모델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는 휠체어 33종 중 12종(34%)에 불과하다.

장애인용 화장실도 적다. 국내 관광지 중 가장 시설이 좋다는 제주 지역도 다르지 않다. 제주관광약자 접근성안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제주 관광지 140개소 중 장애인 화장실이 미설치된 곳은 34%에 이른다. 음식점은 사정이 더 나빠서 이지제주 홈페이지에 등록된 음식점 339개소 중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된 곳은 26개소(7.7%)에 불과하다.

국내여행조차 환경이 이러니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것이 장애인의 현실이다.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해외여행기를 연재하는 안성빈 칼럼니스트는 "장애인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금전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고 차량 보유율도 낮아 여행 한 번 가는 게 인생에서 엄청나게 큰 도전"이라고 말했다.

화장실 안 가려다 탈수 증세까지… "여행 장려 정책 필요"

박창용 에이블투어 대표가 지난달 28일 경기 양주시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박창용 에이블투어 대표가 지난달 28일 경기 양주시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이런 이유로 장애인들은 지역 복지관이나 지자체에서 대기업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단체관광 프로그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단체여행이라 개인 선호가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다. 장애인전문여행사 에이블투어 박창용 대표는 "한번은 지방여행 중 장애인 고객이 갑자기 탈수 증세로 쓰러져 응급실로 간 적이 있다"며 "화장실에 자주 가면 함께 여행하는 다른 장애인과 자원봉사자에게 미안하다며 물을 안 마셔 탈이 났던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협동조합이나 장애인전문여행사 등에서 운영하는 소수의 여행 상품이 있지만 이용객이 적어 고사 직전이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여행 프로그램도 코로나19 여파로 대부분 취소됐다.

이에 장애인의 여행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개인 여행을 금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바우처 제도, 4, 5명 단위로 여행할 수 있는 휠체어 탑승 가능 소형차량 개조 지원, 민간 전문여행사 등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휠체어 장애인에게 집중된 관광복지 정책을 시청각 장애인 등으로 다각화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용구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은 "시각장애인은 관광 홈페이지에 들어가 여행 계획을 수립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라며 "박물관에서 소장 유물 모형을 3D프린터로 만들어 시각장애인이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장애인 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말여행 없는 장애인의 삶. 그래픽=송정근 기자

주말여행 없는 장애인의 삶.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승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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