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희곡 당선작 '사탄동맹'

입력
2021.01.01 04:30
32면
0 0
삽화=박구원 기자

삽화=박구원 기자


등장인물

살로메: 살인으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아 복역 중인 젊은 여성. 오른쪽 가슴에 수인번호를 뜻하는 <666> 명찰이 붙어있다.

우르술라: 오랫동안 수형자들의 회개를 맡아 온 늙은 수녀. 수녀복을 입었고 수녀 베일을 쓰고 있다.

요한: 젊고 신실한 남성 교도관.

1

교도소의 접견실. 중앙에 있는 유리 칸막이를 중심으로 왼쪽에 수녀-우르술라, 교도관-요한이 있다. 오른쪽에 수형자-살로메가 있다. 유리 칸막이에는 연필이 한 자루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 몇 개가 뚫려 있다. 우르술라와 살로메는 앉아 있다. 요한은 서서 허리춤에 찬 진압봉을 매만지며 살로메를 흘겨보고 있다. 우르술라, 살로메를 응시하다가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살로메: 가지 마세요 수녀님!

우르술라: 이제야 겨우 입을 여셨군요.

살로메: 절 버리지 마세요. 저를 어여삐 여기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우르술라: 그런데 살로메. 한 달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살로메: .....

우르술라: 말하는 입이 없으면 듣는 귀 또한 소용이 없지 않겠어요?

살로메: 차라리 제가 듣는 쪽이면 좋겠어요.

우르술라: 그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알면서도 굳이 말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무엇을 망설이지요?

살로메: 하지만 수녀님.

우르술라: 세례를 받았지요?

살로메: 받았어요, 받았습니다.

우르술라: 그래요. 내가 지켜보았지요. 수감된 상태로 세례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열하면서 새사람이 되겠다고, 천주를 섬기며 살겠다고 다짐한 것 제가 똑똑히 보았어요.

살로메: 제 믿음에 군더더기는 없어요.

우르술라: 그럼 말해봐요.

살로메: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르술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로메: 아아!

우르술라: 누구나 길을 잃어버려요. 나는 길잡이랍니다.

살로메: 수녀님 손을 꽉 잡고 전부 털어놓고 싶어요.

우르술라: 사랑의 손은 철창도 뚫어요. 자, 내가 꽉 쥐고 있을게.

살로메: 수녀님.

우르술라: 그래요.

살로메: 수녀님을 믿어도 될까요?

우르술라: 다른 사람 다 밀어내도요. 저 한 사람은 믿으세요.

살로메: 그렇다면 수녀님. 꼭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우르술라: 어디 말해봐요, 살로메.

살로메: 어쩌면 굉장히 무례한 거죠. 하지만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우르술라: 무슨 부탁인데 그래요?

살로메: 담배 한 대만 피우게 해주시겠어요?

요한: (버럭) 안 됩니다, 수녀님!

우르술라: (타이르듯) 자, 살로메.

살로메: 십 년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피웠어요.

우르술라: 십 년을 안 피웠는데도 담배 생각이 납니까?

살로메: 불안하고 괴로울 때면 저도 모르게.

요한: 교정 질서를 해치면 처벌이다! 모르나?

살로메: 담배 한 개비만 주시면 고해성사를 시작하겠어요, 정말입니다.

우르술라: 참으로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요.

요한: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고해가 수녀님을 위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살로메: 안 된다면 입 다물고 지옥 갈래요.

우르술라: 어머, 살로메!

요한: 보십시오, 수녀님.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답니까?

살로메: 죄송해요! 진심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간절하답니다.

요한: 나가시죠, 벌써 어둑어둑합니다.

우르술라: 요한.

요한: 네, 수녀님?

우르술라: 생각을 좀 해봅시다.

요한: 시간을 낭비하시는 겁니다.

사이

우르술라: 이렇게 합시다, 살로메. 제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제가 담배 한 개비를 가져와서 (유리 칸막이를 문지르며) 이 구멍에 꽂아 넣지요.

요한: 뭐라고요?

우르술라: (미소 지으며) 하지만 불은 붙여줄 수 없어요.

살로메: 정말이시죠? 약속하시는 거죠?

요한: 수녀님!

우르술라: 그래요. 약속합니다.

살로메: 감사합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요한: 지금 이건 선을 넘으시는 겁니다.

우르술라: 자, 요한.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요한: 왜 이 여자에게만 예외를 두십니까?

우르술라: 알잖아요, 요한. 여기 오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란 걸. 내일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난 다른 교구로 떠납니다. 이제 올 일이 없는 거예요. 그뿐인가요. 이 사람 가진 죄가 너무나도 큽니다. 참회의 길로 나아가는 걸음은 억겁만큼 무거울 테지요.

요한: 남편을 불태워 죽인 여자가 어찌 감히 구원받는단 말입니까.

우르술라: 회개한다면 그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 진작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우르술라: 뭘 말입니까?

요한: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수녀님.

우르술라: 뭔가요?

요한: 이 여자는요, 수녀님. 사탄입니다.

우르술라: 사탄!

요한: 네. 사탄!

사이

우르술라: (살로메를 슬쩍 보며) 어떻게 알지요?

요한: 지난 십 년 동안 저 여자가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봤어요. 밤마다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제 개인실까지 들려옵니다. 웃음 뒤엔 흐느끼지요.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절망스럽게 흐느낍니다.

우르술라: 수감자들은 종종 불안과 괴로움에 휩싸이지 않습니까?

요한: 그뿐만이 아닙니다. 몇 달 전에는 칫솔을 삼키며 자살소동을 벌였습니다. 아시죠, 자살이 죄인 거. 막으려고 감방에 들어간 제 귀에 대고 저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우르술라: 뭐라고 했죠, 살로메?

살로메: 키스하게 해달라고 말했어요.

요한: 팔을 제 목에 감았죠. 저를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우르술라: 사실입니까, 살로메?

살로메: 그날 많이 외로웠어요.

요한: 명찰에 적힌 수감번호를 한번 보십시오.

우르술라: (수감번호를 보고) 네, 666번이네요.

요한: 심지어 뱀띠입니다, 저 여자.

우르술라: 세상에.

사이

우르술라: 그게 답니까?

요한: 예?

우르술라: 나도 뱀띠에요.

요한: 하지만 의심 가는 게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르술라: 진실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요. 살로메가 사탄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살로메가 사탄이라고 해도 난 기꺼이 이야기할 거예요.

요한: 어째서요?

우르술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잖아요.

요한: 지금 장난하십니까?

우르술라: 고해성사가 장난입니까? 자리를 비켜주세요.

요한: 안 됩니다, 수녀님. 이제 그만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우르술라: 나갈 사람은 요한입니다. 내가 곧 떠나더라도, 성당에서 전달하는 교정 후원금을 중지시킬 수는 있으니까요.

요한, 씩씩거리다가 마지못해 사라진다.

우르술라: 살로메.

살로메: 네.

우르술라: 당신은 약속을 원했고.

살로메: 수녀님께서 약속을 해주셨죠.

우르술라: 그리고 악의에 찬 비난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였어요.

살로메: 감사합니다.

우르술라: 이제 고해성사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나요?

살로메: (성호를 긋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르술라: 아멘. 당신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고하겠습니까?

살로메: 모든 것을 고하겠다고 선서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우르술라: 마음 닿는 곳부터.

살로메: 그래요, 십계명. 성경 맨 앞장이나 맨 뒷장에는 항상 십계명이 있으니까요. 처음 막 성경을 읽었을 때가 떠올라요. 모든 계명이 저를 꾸짖는듯 했죠. 일계,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았고 이계, 하느님의 이름 간직하지 않았고 삼계, 주일마다 세상을 저주하였고, 오계,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계, 하느님을 살인자의 아버지로 만들었지요.

우르술라, 움찔한다.

살로메: 왜 그러세요, 수녀님?

우르술라: 아닙니다, 계속하세요.

살로메: 육계, 배우자도 아닌 사람과 음란한 적이 있고. 많이도 했고 죄인 줄을 알면서도. 칠계, 도둑질도 숱하게 했답니다. 팔계, 누구보다 거짓말을 많이 했어요. 구계와 십계는 지금의 처지와는 관련이 없지만, 아뇨, 어쩌면 다 관련이 있겠네요. 저 정말 구제불능이었어요.

우르술라: 이제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사건을 말하겠습니까?

살로메: 네, 수녀님. 하겠습니다. (목구멍에서 커다란 쇠구슬을 꺼내듯 힘겹게) 저는 제 남편을 불태웠습니다.

우르술라: 다른 이도 아니고 사랑을 맹세한 남편을, 대체 왜 죽였습니까?

살로메: 힘들었습니다.

우르술라: 조금 더 풀어서 말해줄 수 있어요?

살로메: 화도 많고 짜증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손을 올리고 윽박질렀지요. 억지로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했어요. 관계를 할 때도 마음 편히 한 적이 없습니다. 동영상을 찍자거나, 다른 남자랑 셋이서 해보자는 등 끊임없이 강요했습니다.

우르술라: 이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살로메: 이혼 얘길 꺼냈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죽었을 지도 몰라요.

우르술라: 생각만으로도 무척 힘들었겠군요.

살로메: 안감이 바늘로 된 옷을 입고 사는 것처럼.

우르술라: 딸이 하나 있었죠?

살로메: 그때 열 살이었어요.

우르술라: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요. 만약 죽은 게 어린아이였다면, 난 지금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인 사람이 남편이기 때문에 난 지금….

살로메: 제게 더 마음이 가나요?

우르술라: (놀라며) 맞아요, 당신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살로메: 고맙습니다.

우르술라: 딸은 잘 지내고 있습디다.

살로메: 만나보셨어요?

우르술라: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살로메: 걘 무신론자인데도 그래요.

우르술라: 어떻게 죽였는지 말할 수 있겠어요?

살로메: 그날 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사이

살로메: 혹시 아세요? 심장 속에 뱀 수백 마리가 들끓는 것 같은 기분. 그날 저는 그런 기분이었고 나쁜 느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였죠. 세상이 뚜렷하게 보였어요. 사물의 외곽선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것을 꼬집어 볼 수도 있었어요.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신기했죠. 일을 마치고 아침, 집에 돌아가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집은 난장판이었죠. 항상 그래요. 청소하면 하루 만에 어지러워지고, 아무리 닦아도 식기가 쌓여있어요.

우르술라: 그래서요?

살로메: 안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지만, 남편은 거기 없었어요. 침대 위에 뭐가 있기는 했죠. 낡아빠진 종이뭉치였어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서 빨리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남편이 욕을 할 것 같아서요. 양이 꽤 많더군요. 내다 버리기에는 무거웠고요. 그때 어떤 속삭임 같은 것이 들려왔어요. 태워. 불 태우면 되잖아.

우르술라: 태워요? 방 안에서?

살로메: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목소리를 따라갔어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게 좋은 방법 같았거든요. 전 불을 사랑해요. 불타는 것을 보면 희열을 느껴요. 십 년 전쯤 지방에 커다란 산불이 일어났던 거 기억하시죠. 다른 모든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저는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꼈어요. 세상의 모든 산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으면 좋겠어요. 불길이 합쳐지면서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 낼 거예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몸 구석구석으로 하느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종말의 한 풍경 같겠죠.

우르술라: 태운 뒤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살로메: 재가 엄청나게 나왔어요. 흘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죠. 담을 수 있을 만큼 담아서 화장실로 끌고 갔어요. 물을 틀어두고 배수구에 쏟아버렸습니다. 전부 처리하는데 한나절 넘게 걸렸어요. 아마 수도세가 엄청나게 나왔을 거예요.

우르술라: 물불을 가리지 않았군요.

살로메: 일을 마치고 나니 흑설탕 같은 졸음이 쏟아지더라고요. 한 시간 정도 잤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문을 열었더니 경찰이 있네요. 누가 화재 신고를 했다나요. 바로 그 순간, 재는 피로 보여 뚝뚝 흐르고, 집안 가득 희뿌연 연기와 고기 타는 냄새…. 경찰이 저를 지나쳐 안방으로 뛰어가자마자, 심장 속에 웅크리고 있던 수백 마리 뱀들이 심장을 빠져나가 곳곳으로 흩어졌어요. 싱크대 아래로, 현관 밖으로, 화장실 배수구로….

우르술라: 하나만 묻죠, 살로메. 후회합니까?

살로메: 후회합니다, 수녀님. 어떻게 해야 이 죄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르술라: 이건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어요.

살로메: 다행이네요. 이런 저라도 하느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니.

우르술라: 하지만 당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살로메: 왜요?

우르술라: 당신은 사탄이니까요.

사이

살로메: 수녀님?

우르술라: 당신은 속삭임을 듣지도 않았고, 뱀이 들끓는 느낌을 받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속삭임이고, 당신이 뱀이기 때문이죠.

살로메: 절 믿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우르술라: 당신에게 세례를 줄 때 있죠. 어쩐지 나는 놀림 받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악한 연극이고, 나는 무대 위로 끌려 나온 관객 같은 거예요. 대세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살로메: 그게 이유인가요?

우르술라: 그때는 그저 의심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확신하기에는 부족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당신의 고해성사를 듣고 싶었습니다.

살로메: 왜요?

우르술라: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요.

살로메: 말이 안 돼요. 제가 사탄이라면 세례를 받았겠어요?

우르술라: 사탄은 하느님을 욕보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죠. 메시아로 위장할 수도 있어요. 성경과 교리에 통달했으니까요.

살로메: 제가 사탄에 씌였다는 말씀인가요?

우르술라: 연기할 필요 없어요, 살로메.

살로메: 연기가 아니에요. 구해주세요. 떼어주세요, 수녀님. 수녀님처럼 순결한 사람은 아니지만 저도 수녀님처럼 울고 웃는 사람이에요.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인데. 수녀님마저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우르술라: 십계명이요.

살로메: 네?

우르술라: 아까 십계명을 말할 때, 하느님을 살인자의 아버지로 만들었다고 했었지요. 그건, 그런 모독은, 평범한 인간은 할 수 없어요. 내게 백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런 말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어요. 음울하고 고독해 보이는 그림자가 사실은 타오르는 화염의 뒷면이었음을, 죽은 듯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실은 흑점처럼 이글거리고 있었음을, 말라 주름진 두 손이 기름 부음을 받은 듯 광이 난다는 것을. 그리하여 초라해 보이던 당신이 실은 그 누구보다 강대하고 도전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죠.

살로메: (울먹이며) 타고났답니다.

우르술라: 나는요, 살로메. 찾고 있었어요.

살로메: 찾았다고요?

우르술라: 여태껏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고요. 난 오직 남편을 죽인 사람들만 만나요. 분명 그들 중 한 사람일 테니까. 당신은 죽여 왔잖아요. 언제나 당신보다 크고 강한 사람들을, 남편들을 말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요. 칼로 찌르고 줄로 조르고 독을 타고, 썰고 묶고 끓여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죽였어요. 인간이 결혼을 발명했을 때부터 모든 시대, 모든 국가를 아우르면서. 당신은 수도 없이 많은 아내로 변장해 꼭 같은 수의 남편을 죽여 왔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요. 맞죠, 사탄. 당신이지요, 살로메?

살로메: 그러나 내가 사탄이라면 어째서 사탄을 찾아다니신 거죠?

우르술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사이

살로메: (정색하며) 그건 반역이에요.

우르술라: 저도 압니다.

살로메: 하느님을 배신하겠다고요?

우르술라: 그래요.

살로메: 어째서요?

우르술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살로메: (더는 참지 못하고) 푸하하.

사이

살로메: 하하하, 하하….

사이

살로메: (이전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수녀님은 참 재밌는 분이시네요. 노력도 많이 했고요. 나만큼 나를 잘 알고 있으셔. 그래요, 우르술라. 난 사탄이에요. 당신의 적이오, 당신의 신의 적이며 최초의 배교자, 타락을 부추기는 뱀이라.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친구가 되고 싶다니 흔치 않은 경우거든요.

우르술라: 그렇게 쉽게 정체를 밝혀도 됩니까?

살로메: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수녀님이 알았겠어요? 수녀님이 나를 찾고 있다는 거요, 수녀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난 날 찾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아요. 하지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요? 남편도 없으신 분이 어째서?

우르술라: 일단 하나 물읍시다.

살로메: 물어보세요.

우르술라: 천국은 있죠?

사이

살로메: 네, 있습니다.

우르술라: 지옥은요?

살로메: 천국 있듯 있습니다.

우르술라: 수녀가 되기 전에, 난 한 명의 아내였어요.

살로메: 처녀 아닌 수녀라, 드문 일이군요.

우르술라: 남편이 있었습니다. 딸도 있었고. 당신처럼.

사이

우르술라: 그리고 딸에게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겼죠.

사이

우르술라: 남편과 딸을 떼어놓아야 했기에, 딸을 보호해야 했기에 이혼을 했어요. 딸은 어렸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았어요. 하지만 딸이 죽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죠. 딸은 어느 날의 하굣길에 이어폰을 끼고 걷다가 트럭에 치여 죽었어요.

사이

우르술라: 소리를 아주 크게 틀어놓은 모양이죠.

사이

우르술라: 딸이 죽고 싶어 했는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 일을 극복했을지 나는 몰라요. 그런 얘길 나눌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난 그 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어요. 어디 하나 금 간 데 없이 멀쩡해요.

사이

우르술라: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 딸이 천국에 있기를 바랐거든요. 순결한 몸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말씀드린 뒤 정결 서약을 하고 고해성사를 하여 수도자가 될 수 있었어요. 당신 말처럼 드문 일이었습니다. 외국에도 몇 없을 거예요. 하여튼 시간이 많이 흘렀지요. 미사를 드리고 무릎 꿇고 치성드릴 때마다, 사랑과 용서를 생각할 때마다 웃자란 분노가 조금씩 사라지더군요. 하지만 성당에서, 우연히 전남편과 마주쳤을 때, 심장은 창에 찔린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옵니다. 지난 시절 자신의 잘못이 뼈아픈 후회라고 하면서 딸 얘길 꺼내요. 아까 내가 했던 그 말을 남편이 합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조금만 놓아도 다 떨어질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깨닫습니다. 내가 모르는 새 그 또한 하느님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맘속 깊은 곳에서 인양을 기다리던 불꽃이 몸을 뒤덮고, 심장은 뱀굴이 되어 수백 마리가 들끓습니다. 내 딸이 천국에 있기만을 바랐는데, 전남편이 회개하여 천국에 간다면 두 사람은 마주칩니다.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 딸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딸에게 용서받는 것이 최고의 결말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을까요. 마주친 그때, 달려들어 목을 조를 수 있었을까요. 손목은 앙상하고, 허약한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난 달아났어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거죠. 하느님은 그를 벌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과 내게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찾아 헤맨 것입니다. 이제 나는 부탁합니다. (무릎 꿇으며) 전남편을 죽여주세요. 누군가 그를 응징했음을, 죽을 때 크나큰 고통을 느꼈음을 딸이 알게 해 주세요.

살로메: 우르술라.

사이

살로메: 그대는 오해하고 있어요.

우르술라: 무엇이든 약속하겠습니다. 나를 어디에 부려도 좋아요. 나를 당신의 내기에 제물로 써도 좋아요. 혀를 자르고 팔다리를 분질러 하느님 앞에 들이밀어도 좋아요.

살로메: 제물로 안 써요. 혀도 안 자르고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하지만 난 살인청부업자가 아닙니다. 나는 죄 자체지, 죄의 대리자가 아니에요.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살인자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소원을 이뤄주지는 않아요.

우르술라: 그럼 당신이 해 온 일은 다 뭐였던 거죠?

살로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

우르술라: 네?

살로메: 세상에는 아내의 수만큼 남편이 있어요. 꼭 같지는 않지만 딸들도 있고요. 자, 내가 보아온 바, 아내 한둘이 남편을 죽이고 있을 때 훨씬 더 많은 수의 아내와 딸이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나의 일? 다른 일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쟁도 아니고, 학살도 아니고, 징병도 아니거니와 강간도 아닙니다. 내 일은 표본을 만드는 거예요. 남편을 죽여야만 할 때, 나를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말이죠. 나는 옛적 고대로부터 남편 살해의 모델을 만들어왔어요. 주저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성경에 실린 말을 정확하게 어길 수 있도록. 미약하기는 해도, 남편을 죽이는 아내는 조금씩 많아지고 있답니다. 종막에는 남편에 죽은 아내보다 아내에 죽은 남편이 많아지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사이

살로메: 남편을 죽인 아내는 모두 지옥에 갑니다. 살인도 죄지만, 남편을 살인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죄이거든요. 그 처사를 이용하려는 겁니다. 아내들로 가득한 지옥에 남편들은 감히 발도 들일 수 없어야 해요. 그곳은 반역의 나라요, 죄악의 거점이 되어야 해요. 그러나 한 가지. 이 죄악은 아내 자신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내가 부린 마술로는 하느님을 욕보일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까? 당신이에요, 우르술라. 당신이 해야 해요. 난 그저 표본에 불과해요.

우르술라: 늙고 병든 제가 어떻게….

살로메: 성경 속에 있는 말을 기억합니까?

우르술라: 어떤 말….

살로메: 아내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니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는 말.

우르술라: 기억해요.

살로메: 그래요, 깨지는 것은, 깨지기 전까지 여리고 약한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깨진 다음에는 여리지도, 약하지도 않고 날카로워 찌를 수도 휘두를 수도 있어요. 깨지세요. 깨버리세요. 당신 손으로 당신 자신을 깨뜨려요.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해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우르술라: 나를 믿기 때문인가요?

살로메: 바로 그거예요. 우리는 포개어져요, 수녀님. 우린 만나게 되어 있었어요. 이다음에도 만나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공으로 세상에는 또 하나의 표본이 생기고, 그걸 본 사람은 더욱 쉽게, 그 사람을 본 사람은 더더욱 쉽게. 난 그걸 퍼뜨리고, 퍼뜨리면서 같은 얘기를 해줄 겁니다. 너희는 지금 사탄과 동맹 중이라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요한이 나타난다.

요한: 수녀님.

우르술라: (깜짝 놀라며) 언제 들어왔어요?

요한: 저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이

요한: 성탄절입니다. 축일이죠. 감옥에 계셔서 모르겠지만, 바깥엔 함지박 만한 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

요한: 축일에는 많은 것이 용서됩니다.

우르술라: 살로메?

살로메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우르술라와 요한을 지켜본다.

요한, 천천히 우르술라에게 걸어간다.

요한: (살로메를 힐끗 보고) 수녀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탄을 꾀어내어 정체를 밝혀냈고 계획을 파헤치셨습니다. 엄청난 공훈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 거짓과 신성모독이 있었지만요.

우르술라: 거짓을 말한 적 없습니다.

요한: 그 각오, 대담함은 분명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수녀님을 보고 배울 사람이 많습니다.

우르술라: 보고 배워요? 누구에게 가르칩니까?

요한: 누구긴요, 방종한 아내들이죠. 저도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답니다.

우르술라: 당신이? 당신은 여길 떠나지 않잖아요.

요한: 물론이죠. 아내가 바로 이 옆 감방에 있으니까요.

사이

요한: 수녀님과 같은 뱀띠랍니다.

우르술라: 요한, 요한 당신은….

요한: 수녀님. 저는 이 감옥을 지켜왔습니다. 여기서 먹고, 여기서 자고 여기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 아버지가 했죠. 아버지 전에는 할아버지가 했고요. 아무도 내보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이 감옥을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죽어 나가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수녀님께는 기회가 있죠. 하느님과 함께 들어오셨으니까요. 아직 시간은 있어요. 제 개인실 내벽에는 십자가가 걸려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그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우르술라: 다가오지 말아요.

요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수녀님을 사랑하시는데, 왜 하느님께 반역하려고 듭니까?

우르술라: 더 이상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않을 겁니다. 수녀 그만둘 거니까요.

요한: 전남편 때문입니까?

우르술라: 아뇨, 그것과는 별개입니다.

요한: 제게 말해보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르술라: 수녀의 삶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요한? 우린 신부들에게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그들의 옷을 세탁하고 성당을 청소하고 그들이 먹은 그릇을 치워요.

요한: 그래서요?

우르술라: 그들의 옷을 다림질하고 점심에 저녁까지 차려준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어요. 죽을 때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 그까짓게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우르술라: 안드레아 수녀는 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조차 설거지와 가사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로요. 많은 수녀가 생각해요.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다음에 올 수녀도, 그다음에 올 수녀도 우릴 보고 따라할 테니까. 그걸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될 테니까.

요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르술라: 나뿐만이 아닙니다. 자매들 모두 일제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는 다른 교구로 가지 않아요. 우린 베일을 벗고 성당을 떠납니다.

요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희생과 봉사는 사랑과 용서에 버금갈 만큼 값지고 거룩한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르술라: 그 거룩함이…. 왜 언제나 몇몇 사람들의 몫이어야 합니까?

요한: 모르십니까?

우르술라: 당신은 압니까?

요한: 알다마다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남성의 돕는 배필로 여성을 지으셨다고요. 읊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라. 성당으로 돌아가십시다. 수녀님. 저는 아무것도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악마는 이제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게 격리하겠습니다. 감옥 안에서 외롭게 죽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는 누구도 타락시키지 못하게요.

우르술라: 우리는 당신보다 강해요.

요한: 따님 얘기는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르술라, 움찔한다.

요한: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따님은 분명 좋은 분이실 테고, 훗날 남편 분께서 하느님 부름을 받고 올라가면 따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실 겁니다. 둘은 좋은 부녀지간으로 천국에서 잘 지낼 겁니다.

말을 마친 요한, 진압봉을 꺼내 손에 쥔다.

우르술라,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여 떤다.

요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르술라: 개인실로… 가겠습니다.

요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우르술라, 고개 돌려 살로메와 눈을 맞춘다. 제법 오래.

그다음 쓰고 있던 베일을 벗어 양 손에 칭칭 감은 뒤 앞장서 가는 요한의 목에 걸어 온 힘을 다해 조른다.

요한은 마구잡이로 팔을 휘젓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헐떡이다가 축 늘어진다.

우르술라, 숨을 몰아쉰다.

살로메, 유리 칸막이가 존재하지 않는 듯 걸어 나가 우르술라의 곁으로 간다.

살로메: 우르술라.

우르술라: (요한이 죽었는지 확인하며) 네, 살로메.

살로메: 미안해요.

우르술라: 뭐가요.

살로메: 우르술라가 그런 말을 듣게 한 거요.

우르술라: 왜 살로메가 사과합니까?

살로메: 내가 막았어야 했어요.

우르술라: 아뇨, 이 사람 잘못인걸요.

사이

우르술라: 그런데요, 살로메. 만약 좋은 남편들이 있다면, 아내를 해치지 않으며 존중하고, 화합하는 남편들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그들도 모두 죽기를 바라나요. 그들도 죽어야 하나요?

살로메: 좋은 남편이라면 마땅히 아내를 돕겠죠.

사이

우르술라: 좋아요. 요한의 아내를 만나러 갑시다.

우르술라, 요한의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든다.

살로메: 수녀를 그만두겠다고 했죠?

우르술라: 그렇습니다.

살로메: 이 순간부터 당신을 달리 부르겠어요. 수녀가 아니니 수녀라 부를 수 없고, 하느님을 배신했으니 세례명으로 부르지 않겠어요.

우르술라: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요?

살로메: 할머니요.

우르술라: 할머니?

살로메: 네, 할머니.

우르술라: (멍하니 살로메를 보다가) 아, 참. 내 정신 좀 봐.

우르술라,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살로메에게 한 개비 준다.

살로메: 돛대네요.

우르술라: 같이 피우죠, 뭐.

살로메: 피우면서 가요.

우르술라: 가면서 불을 붙여줄게요.

살로메: 그래요, 할머니. 여길 나가요.

우르술라와 살로메, 요한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감옥을 빠져나간다.

문 잠그는 소리.

이철용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