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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언어와 언어가 만날 때

입력
2020.12.14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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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지난 10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 연습실에서 배우들이 음악극 '세자전'의 연기 연습을 하면서 웃고 있다. 이들이 방역지침을 준수해 가며 구슬땀을 흘렸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이달 27일까지 공연이 중단된 상태다. 오세혁 연출가 제공

지난 10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 연습실에서 배우들이 음악극 '세자전'의 연기 연습을 하면서 웃고 있다. 이들이 방역지침을 준수해 가며 구슬땀을 흘렸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이달 27일까지 공연이 중단된 상태다. 오세혁 연출가 제공


연습 [명사]. 학문이나 기예 따위를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힘.

모든 공연은 반드시 연습을 거친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최소 두 달 이상의 기간을 연습에 매진한다. 두 달간 함께 연습을 한다는 것은 ‘두 달간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저마다의 공간과 시간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무대 위의 ‘공간’에서 함께 살기 위해, 연습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작은 기적이다.

연습 첫날 대본을 읽으면 각양각색의 의견이 쏟아진다. 누구는 재밌는데 누구는 밋밋하고, 누구는 웃긴데 누구는 슬프며, 누구는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구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일까 의문이 든다. A에겐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배역이 B에겐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C에겐 참으로 친절한 대사가 D에겐 참으로 불친절한 대사가 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묻는 배우가 있고,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지’ 확인하는 배우가 있다.

이들의 말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같은 언어로 된 대본을 읽고 있지만 삶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겪어온 상처가 다르며, 꿈꾸는 방향도 다르다. 우연히 극장에 갔다가 벼락 같은 충격으로 배우가 된 사람이 있고, 꺼내지 못한 마음을 꺼내고 싶어서 배우가 된 사람이 있다. 자신의 성격을 바탕으로 연기에 접근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에게 영감을 받아 연기를 만들어내는 배우가 있다. 극장을 꿈의 광장이라 말하는 배우가 있고 인생의 학교라 외치는 배우가 있다.

이들은 하나의 무대를 꿈꾸며 모였지만,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어쩌면 연습이란 각자의 언어로 꿈꾸는 이들이 공통의 언어로 꿈을 꾸려 노력하는 시간일 것이다. A의 웃음은 사실 눈물이며, B의 침묵은 사실 비명이다. 눈물로만 울던 C는 A를 보며 웃음으로 울 수 있게 된다. 비명으로만 절규하던 D는 B를 보며 침묵으로 절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언어가 서로에게 스며들며 마침내 어떤 교집합의 언어가 생겨난다. 웃는 눈물과 침묵의 비명으로 이루어진, A와 B와 C와 D를 넘어서는, ABCD의 언어.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무대가 사라지면, ABCD의 언어는 다시 A와 B와 C와 D의 언어로 갈라진다. 그들은 또다시 저마다의 무대를 찾아 떠나고, 또 다른 삶의 언어를 만나서, 또 한 번의 새로운 무대언어를 만들어낼 것이다. 많은 극장이 잠시 막을 내렸다. 각각의 극장에서 울려퍼지던 무수한 언어가 잠시 침묵 중이다. 침묵을 침묵이라 생각하면 한없이 슬프기에, 잠시 상상해본다.

어쩌면 이 침묵도 새로운 연습일 수 있다고. 그 언젠가 또다시 찾아올 세상의 재난 속에서, 안전하고 신중하게 무대의 세상을 건설하려는 연습. 상처의 언어를 견디기 위한 상상의 언어. 아마도 그 언어를 찾는 길은 참 어렵고,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찾게 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저마다의 공간과 시간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무대 위의 ‘공간’에서 함께 살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함께 고민하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큰 기적이 될 것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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