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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만세? 소수자들은 그 환희에 끼지 못했다

입력
2020.09.21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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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통일과 소수자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1990년 10월 3일은 수요일이었다. 그 날 저녁 베를린 중심지 옛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동서독의 통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은 통일을 선포했다. “자유로운 자결권에 기초해 우리는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완성합니다. 우리는 유럽 통합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그 과제를 이행하면서 우리는 신과 인류 앞에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종소리가 퍼지고, 베토벤이 울렸다. 폭죽이 올랐고 감동이 일었다. 세계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한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개막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쳤다. 특히 한반도 남단의 주민들은 얼굴의 모든 곳이 움찔거렸다. “우리 또한 그러하리라!” “우리도 그들처럼!”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중심지 옛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치러진 독일 통일 축하 기념식.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왼쪽부터)와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넬로레 콜과 헬무트 콜 총리 부부, 바이체커 대통령이 연단에서 시민들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독일연방기록원 제공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중심지 옛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치러진 독일 통일 축하 기념식.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왼쪽부터)와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넬로레 콜과 헬무트 콜 총리 부부, 바이체커 대통령이 연단에서 시민들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독일연방기록원 제공


30년 전 그날의 사진과 영상을 다시 보면 행사장 연단의 정중앙에 한 여성이 보인다. 야당 지도자 라퐁텐과 빌리 브란트와 외무장관 겐셔, 콜 총리와 바이체커 대통령 사이에 유일한 여성 하넬로레 콜이 미소를 띠고 있다.

콜의 부인 하넬로레에게도 그 순간은 벅찼다. 그가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돌봐” 남편이 통일 정치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는 식의 얘기는 억지 미담에 불과하다. 하넬로레는 이기적인 남편을 만나 힘들었다. 바쁜 남편을 마냥 기다렸고, 남편을 겨냥한 정치 공격이 때로 자신에게 인신 비방으로 쏟아지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넬로레는 “그 어려운 시기”에 “산처럼 자신을 지켜준” 남자를 만난 것에 고마워했다. 둘은 1948년 서독 라인 강 자락 루트비히스하펜의 학교 축제에서 만나 12년의 연애 끝에 1960년 결혼했다.

첫 만남 당시 콜은 18살, 하넬로레는 15살이었다. 하넬로레가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던 이유는 강간 피해와 척추 부상 때문이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하넬로레는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어머니와 함께 소련군 여러 명에 의해 윤간을 당했다. 심지어 소련군들은 성폭력 뒤에 모녀를 창밖으로 “시멘트 부대 자락처럼” 내던져 버렸다.

당시 12살이었던 하넬로레는 정신적 상처도 심했지만 척추를 심하게 다쳐 평생 고생했다. 하넬로레는 1960년대부터 페니실린 알레르기로 고통을 받았다. 척추 치료제가 낳은 부작용이었다. 1993년 의사의 약 처방 오류로 다시 햇빛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져 격심한 통증을 겪으며 밤에만 잠시 움직이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는 2001년 7월 4일 밤 11시경 약물 복용을 통한 자살로 삶의 고통을 끝냈다. 한 때 산처럼 든든했던 남편 콜은 곁에 없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다른 일로 여전히 바빴다.

1990년 독일통일은 1949년 독일분단의 극복이기도 했지만 1933년 등장한 나치즘 과거사의 극복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1945년 종전을 전후한 혼란과 무책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가는 폭력과 추방에게도 종지부를 찍는 의미가 있었다. 독일통일을 위한 평화협상은 남성 정치가들의 작품이었다.

독일통일을 선포하고 자축하는 중노년 남성 정치가들의 무리에서 하넬로레는 남다른 감회를 가졌다. 통일총리의 부인으로서만이 아니라 1945년 성폭력의 희생자로서 그는 통일독일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유’와 ‘자결권’과 ‘평화’가 유린되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전쟁이나 물리적 충돌이 없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과 적대가 예방되고 상호 신뢰와 존중이 필요했다. 독일통일은 여러 차원에서 그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사회 소수자의 관점을 가지면 독일통일에 대한 찬가를 따라 부를 수 없었다.

동독 주민의 관점에서 흡수통일을 비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종적 소수자의 관점에서 배제와 폭력의 새로운 위협을 밝히는 일이다. 사실 이 주제는 백인 남성 중심의 독일사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역사학계에서도 아직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기실 통일독일 직후 가장 급박하고 심각했던 정치 이슈는 동서독의 차이나 동독인들의 소외 문제가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적대 행위와 폭력 가해였다.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은 그 문제를 다시 통일 후의 일시적 일탈이나 소수에 의한 주변적 일화쯤으로 다룬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피해와 희생에 대한 망각과 무시의 형식일 뿐이다.

1991년 여름 독일은 외국인을 노린 적대 행위와 폭력 사건이 빈발했다. 특히 1991년 9월 17일부터 23일 사이에 동독 지역 작센 주의 호이에르스베르다(Hoyerswerda)의 폭력은 그나마 유지되던 안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폴란드 국경에 가까운 호이에르스베르다에서 네오 나치들은 외국인 계약노동자들과 동유럽 난민들의 숙소에 불을 지르고 위협하며 돌을 던졌다. 폭력은 특별한 원인이 없어도 혐오를 숙주로 해서 순식간에 경계를 넘어 증폭됨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9월 17일 8명 안팎의 네오 나치들이 호이에르스베르다의 시장에서 베트남 출신 상인들을 골리고 때렸다. 베트남인들은 난민 숙소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네오 나치들은 숫자가 늘어났고 그 숙소로 몰려가 난동을 부렸다. 숙소에는 160명 남짓의 베트남과 모잠비크 출신 계약노동자들이 거주했다.

그들은 통일 전 동독 국영회사와 계약을 맺어 동독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했고 애초 계약기간은 아직 몇 달이나 남았다. 다만 동독 국가는 무너졌고 회사는 사라졌기에 그들의 계약서가 휴지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당장 쫓겨나기는커녕 폭력의 대상이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1989년 5월 동독의 켐니츠 지역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투표에 베트남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계약직 노동자가 참여하고 있다. 당시 동독 지역엔 베트남, 쿠바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독일연방기록원 제공

1989년 5월 동독의 켐니츠 지역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투표에 베트남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계약직 노동자가 참여하고 있다. 당시 동독 지역엔 베트남, 쿠바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독일연방기록원 제공


충격적인 것은 조직화된 네오 나치들만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지지와 경찰의 방관이었다. 그들 또한 “외국인은 꺼져라”는 네오 나치의 구호에 호응했다. 대략 500명의 인근 주민들이 네오 나치의 폭력과 구호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동독 공산주의에 항의하며 ‘자유’를 찾고 분단을 뚫고자 통일을 원했던 그들이었다.

아울러 경찰은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아니 보호하지 않았다. 사실 경찰에겐 그 계약노동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다. 사건 직후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들은 본국으로 쫓겨났다. 당시 무책임한 우파 정치가들과 선정적인 보수 언론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폭력 피해에 대해 걱정하고 대책을 요청하기보다 독일 시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불안을 이해한다고 말했으며 노골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과 난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기도 했다. 특히 집권 여당 기민련 정치가들은 난민 수용에 대한 반대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를 방관했다.

1992년 한 해 동독의 북쪽인 메클렌부르크-폼메른 주만 보더라도 외국인을 겨냥한 극우 테러 사건이 207번이 발생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외국인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것 외에도 동독 정부와 계약을 통해 건너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숙소에 50에서 200명씩 몰려와 방화와 투석을 일삼았다.

통일 전 동독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상당기간 동독 지역 곳곳의 일상세계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물론, 동독 지역에서도 그와 같은 나치의 폭력과 일부 주민들의 외국인 혐오에 맞서 대중시위와 조직 활동이 새롭게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고삐가 풀린 이주민과 난민 혐오를 잠재우기는 쉽지 않았다.

통일 후 서독 지역의 외국인 혐오나 난민에 대한 폭력은 동독 지역과는 달리 빈번하거나 노골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통일 후 서독의 일부 지역에서도 네오 나치들은 난민 숙소에 대해 물리적 테러를 감행했다. 경찰들이 수수방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베를린, 심지어 서베를린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네오 나치들이 서베를린에서 “외국인 꺼져”, “터키 놈들 꺼져” 구호를 외쳐대며 공포를 조장했다.

이주의 가족사 배경을 지닌 외국계 독일인들은 순식간에 배타적인 민족주의 감정의 물결에 위기와 불안을 겪었다. 정치와 언론이 그 문제를 별 일 아닌 것으로 다루었고, 심지어 비판 세력이나 좌파들도 둔감했다. 이주민 출신 독일인들은 스스로 자기 보호와 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독일통일은 공동체 주민 모두에게 자유와 평화를 제공하지 못했다. 새로운 갈등과 균열, 위기의 시작이었다.

동서독의 ‘통합’은 기본적으로 주류 다수 사회(서독)와 소수자 집단(‘동독인’)의 관계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문제를 그렇게 보면, 또 다른 소수자 집단, 이를테면 인종과 문화가 다른 이주민과 난민 출신 사회구성원들의 통일 경험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에게 통일은 느닷없는 계약해지였고 갑작스런 돌팔매질이었다. 양복 입은 중노년 남성들이 ‘통일’과 ‘번영’을 말할 때 어딘가에는 폭력과 배제의 기억과 경험을 지닌 사회 소수자들이 뒤돌아 서 있다.

1990년 10월 3일에도 '1945년의 폭력 피해자' 하넬로레는 총리 부인으로서 잠시 미소를 띠며 남성으로 구성된 평화정치가들 옆에서 모두에게 안전과 복리의 기회가 열리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새로운 폭력과 증오가 사회의 일부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통일 30주년을 맞는 독일, 멋진 기념과 뿌듯한 회고 속에서 소수자의 삶은 잊히고 있다. 평화는 통일의 환희 뒤에 따라온 증오의 고성과 돌팔매질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 나은 통일의 길은 거기서 시작한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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