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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영어도시 파고든 입시 사교육...학원ㆍ과외 100곳 달해

입력
2020.08.19 04: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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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입자격시험 방학특강에만 월 425만원
학비 5,000만원에 사교육비 5,000만원 들기도
입시지옥 벗어나려 했는데 '학원 뺑뺑이' 답습
'귀족학교' '환경파괴' 논란에도 추가 설립 예정

편집자주

외국인학교와 국제학교는 태생부터 ‘귀족학교’ 논란을 불렀다. 하지만 10여년전 정부는 입학과 설립기준을 크게 완화했다. 이들 학교가 선진교육의 모범을 보이며 천편일률적 국내 교육현장에서 메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리 온상 내지는 외국 명문대 입시를 위한 발판이 돼버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태를 확인하러 학교담장 너머를 들여다봤다.


지난 6일 국제학교 방학을 맞아 한적한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고급 아파트 단지의 모습. 야자나무와 현무암 연석이 이곳이 제주임을 드러낸다. 제주=이성택 기자

지난 6일 국제학교 방학을 맞아 한적한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고급 아파트 단지의 모습. 야자나무와 현무암 연석이 이곳이 제주임을 드러낸다. 제주=이성택 기자

제주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제주도 내륙의 시골 풍경은 이곳에 자리한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들어서자 확 바뀌었다. 서울 여의도만한 영어교육도시에는 도로 표지판에 영어가 병기돼 있고 외국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저층 고급아파트 단지와 타운하우스가 늘어서 있었다. 이곳이 제주라는 사실은 띄엄띄엄 눈에 들어오는 아열대 식물과 현무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 같지도, 외국 같지도 않은 국적 불명의 인공도시에 불시착한 때는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일이었다.

방학인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출입통제가 강화돼 국제학교 4곳의 정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외국인 교사와 그 자녀들만 간간이 학교를 드나 들었을 뿐, 상당수 한국인 학부모와 학생들은 방학을 맞아 제주를 벗어나 있었다. 상점이나 주거지역도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제외하곤 인적이 드물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의 한국국제학교 정문이 지난 6일 방학을 맞아 굳게 닫혀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의 한국국제학교 정문이 지난 6일 방학을 맞아 굳게 닫혀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지난 6일 제주 영어교육도시의 국제학교 중 한 곳인 노스런던칼리지에이트스쿨 제주 학교의 정문이 닫혀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지난 6일 제주 영어교육도시의 국제학교 중 한 곳인 노스런던칼리지에이트스쿨 제주 학교의 정문이 닫혀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그런데 '유령도시' 분위기 속에서도 유독 활기가 도는 곳이 있었다. 영어교육도시 중심부에 자리잡은 사설 학원가였다. 곳곳엔 외국대학 입시 실적을 홍보하려고 학원들이 내건 현수막과 입간판이 설치돼 있었다. 현수막 뒤로는 방학 특강을 들으러 편한 옷차림으로 학원을 오가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생들은 대입 준비를 위해 방학기간 서울 대치동 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적었다.

점심 시간과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에는 고급 수입차를 타고온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자녀를 내려주거나 태우고 갔다. 제주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하’ ‘허’ ‘호’ 번호판이 박힌 렌터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규모는 작아도 서울 대치동이나 목동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건물 4개동으로 구성된 학원가에는 없는 과목이 없었다. 영어학원은 읽기, 쓰기, 토론 등으로 세분화됐고 국제학교 입시, 제2외국어, 수학, 한국어 논술, 입시미술, 국내 검정고시, 음악, 요가 학원도 있었다. 학원 앞에는 과목별 비용이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A영어학원에선 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SAT 방학특강을 열었는데 하루 11시간씩, 주 7회 강의 일정으로 월 425만원을 받았다. 학원비는 강사 국적별로 차이가 컸다. 예컨대 B영어학원의 중등영어 과정(월 30시간)은 내국인 강사는 22만원인 반면, 외국인 강좌는 41만원이었다. 학원가를 벗어나도 학교와 아파트단지 앞에는 국제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입시학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는 "학원 다니려고 멀리 나갈 필요 없다"며 "영어교육도시 내에선 거의 모든 사교육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에서 지난 6일 오후 한 학생이 수업을 마치고 마중 나온 학부모 차에 타고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에서 지난 6일 오후 한 학생이 수업을 마치고 마중 나온 학부모 차에 타고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공인중개사 말대로 동네 게시판이나 가로등 기둥에서는 수학과 영어과외 전단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제주 국제학교 중에서도 특정학교의 중고생만 지도한다고 전단에 소개한 국내 유명대 이과계열 출신의 과외교사의 경우 중1은 시간당 8만원, 고1은 9만원의 과외비를 받고 있었다. 미국대학 의대 출신이라는 다른 과외교사는 수학 과목 기준으로 중학생은 시간당 8만원, 고교생은 10만원이라고 했다. 한번에 1시간 30분씩 주 2회 한다니 중학생은 100만원, 고교생은 120만원 정도의 과외비가 지출된다는 얘기다.

영어교육도시에만 학원ㆍ과외 90여곳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사교육이 깊숙이 파고든 것은 공식자료로도 확인된다. 제주교육청이 국회 교육위원회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은 총 56곳이고, 개인 과외교사도 41명 등록돼 있다. 이곳 학원 수가 유독 많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점점 전국 평균에 수렴하는 모양새다. 영어교육도시 내에서 미등록 학원을 운영하거나 공시한 것보다 교습비를 많이 받다가 적발된 경우가 2015년 2건에서 올해는 7월까지 벌써 13건에 달한 것을 보면, 사교육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 학원비 예시. 그래픽=강준구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 학원비 예시. 그래픽=강준구 기자

사교육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영어교육도시를 선택한 적잖은 학생과 학부모가 꿈꿨던 이상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높다. 창의성보다 암기를 중시하는 천편일률적인 교육과 ‘학원 뺑뺑이’로 대표되는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기를 기대했지만, 제주도 더이상 사교육 청정구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 공실에 입점할 학원을 찾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창문 밖으로 국제학교인 세인트존스베리 아카데미 제주가 보인다. 제주=이성택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 공실에 입점할 학원을 찾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창문 밖으로 국제학교인 세인트존스베리 아카데미 제주가 보인다. 제주=이성택 기자

사교육 증가는 외국 유명대학 진학을 목표로 국제학교에 들어오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어느 정도 예견됐다. 인천 채드윅송도국제학교, 대구국제학교 등 다른 지역 국제학교 학생들도 학원 수업에 많이 의존한다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서울 강남에서 만난 국제학교ㆍ외국인학교 입시 상담에 특화된 컨설턴트는 “미국과 영국의 괜찮은 대학에 합격하는 국내학교 졸업생이 늘고 있는데, 이는 학교에서 잘 가르친 영향이 아니라 학부모가 개인과외 붙이고 돈 들여서 SAT 학원에 보내는 사교육의 힘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수요가 있기 때문에 사교육 공급이 늘어난 측면이 있지만, 반대로 공급이 수요를 자극하는 부작용도 있다. 사교육은 주변에서 시작하면 자기 자녀도 시켜야 할 것 같은 불안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고교생 자녀가 제주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부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곳도 사교육 천국”이라며 “중고교 자녀를 둔 일부 학부모는 사교육비가 1년 학비(4,000만~5000만원)와 비슷해 연간 교육비가 1억원에 달한다”며 씁쓸해했다. 영어교육도시를 관리하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담당자는 “사설학원 증가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상업시설 부지의 건물주가 자신의 상가에 학원을 입점시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조기 유학 수요는 일부 흡수했지만

제주 영어교육도시는 노무현 정부 후반기인 2006년 조성계획이 발표된 뒤 이명박 정부 들어 구체화됐다. 해외 조기유학 수요증가에 따른 외화유출 및 가족이 생이별하는 ‘기러기 가족’ 양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자, 해외유학 수요를 국내에서 흡수해 부작용을 줄여 보자는 게 영어교육도시의 설립 취지였다.

이후 2011년 9월 노스런던칼리지에이트스쿨 제주(NLCS)와 한국국제학교(KIS) 개교를 시작으로 브랭섬홀 아시아(2012년), 세인트존스베리 아카데미 제주(2017년)가 차례로 문을 열었다. JDC는 "해외 유학 희망자를 제주 영어교육도시로 흡수해 절감한 외화가 작년 말까지 6,97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며 설립 취지처럼 유학 수요를 일정 부분 흡수했다고 자평한다.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 1층 복도에 지난 6일 학원들의 홍보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 학원가 1층 복도에 지난 6일 학원들의 홍보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제주=이성택 기자

하지만 이런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연간 학비가 4,000만~5,000만원에 달하는 만큼, 제주 국제학교에는 '귀족 학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특히 영어교육도시 조성에 지금까지 5,000억원이 넘는 공적 자금(국비 1,369억원ㆍJDC 3,921억원)이 투입된 상황이라 ‘나랏돈으로 부유층 자녀를 위한 학교를 지어 줬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의 중요 기능이 사회통합과 국민적 동질성 확보인데, 특별한 가정의 자녀만 갈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학교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이질화하고 계층적으로 분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영어교육도시 조성계획에 따라 앞으로 제주에는 국제학교 3곳이 더 들어설 예정이다. 다만 공적 자금이 투입된 기존 4개 학교와 달리 순수 민간자본만 투입한다는 계획이라 제대로 진행될지는 불투명하다. 교비 수입을 수익금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한 법령 때문에 외국 교육자본이 투자를 주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앵글로-차이니스 스쿨(ACS)이 영어교육도시 문을 두드렸지만 설립계획이 적합하지 않다는 제주교육청 판단에 따라 설립이 무산된 일도 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 국제학교 현황. 그래픽=박구원 기자

제주 영어교육도시 국제학교 현황. 그래픽=박구원 기자

이와 별도로 국제학교 인근에 외국대학과 주거시설을 짓는 영어교육도시 2단계 사업도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착공이 미뤄지고 있다. 제주 환경단체 3곳은 지난달 21일 공동 보도자료를 내고 "2단계 사업부지에 대한 현장조사 결과 멸종위기종 등 생태계 1, 2등급 기준종의 다수가 사업부지 내에 서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사업부지로서 입지가 적합한지 다시 한번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성택 기자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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