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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세계의 빈곤] 취직은 감감, 생계는 막막… 단순 노동 내몰리는 한국 청년들

입력
2020.06.12 01:0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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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 청년들 옥죄는 굴레

코로나發 취업난 최악, 단순노무직 청년 비율 7.4%… 전문가들 “빈곤의 악순환 우려”

지난 1월 경기 수원시의 한 물류창고에서 청년 수십 명이 택배 집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월 경기 수원시의 한 물류창고에서 청년 수십 명이 택배 집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뉴시스

“미래가 안 보이지만 별 수 있나요. 당장 돈은 벌어야죠.”

11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김형민(가명ㆍ28)씨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이렇게 내뱉었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에다 땡볕까지 쏟아지는 도로에 오토바이를 세운 김씨가 헬멧을 벗자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는 “요새는 음식 배달을 하는 낮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고되다”고 말했다.

경기 하남시에 사는 김씨는 공무원 시험 준비와 아르바이트 2개를 병행한다. 점심ㆍ저녁에는 음식 배달대행 앱을 통해 5시간가량 일한다. 하루에 많게는 5만원 정도 번다. 오후 7시부터는 집 근처의 독서실에서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일하고 월 50만원을 받는다.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평균 130만원. 주거비와 생활비를 빼면 학원비도 빠듯하다. 집에 빚이 수천 만원 있어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다. 하루 11시간씩 노동을 하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지만 김씨는 “그렇다고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니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청년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다 생계를 위해 단순노무직으로 내몰리는 건 김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정규직은 씨가 말랐다. 경력을 쌓거나 기술을 배우는 등 숙련 가능성이 없는 단순노무직도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다. 당장 생계가 급한 청년들은 “미래가 없다”면서도 일단 눈 앞의 일자리를 움켜잡는다. 동시에 안정적인 일자리와는 더 멀어지고 꿈은 희미해진다. ‘일자리 빈곤’이 부른 악순환이다.

◇최악의 취업난ㆍ가계부채에 코로나까지…“뭐라도 해야”

통계청의 ‘졸업/중퇴 취업자의 직업별 취업분포’를 보면, 매년 청년(15~29세) 취업자 중 단순노무직 비율은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청년 취업자 329만5,000명 가운데 약 27만명(8.19%)이 단순노무직을 택했다. 2017년 0.08%(6,000명)에 그친 증가폭은 2018년 0.79%(2만7,000명), 지난해 0.53%(1만7,000명)로 뛰었다. 전체 연령대 단순노무 종사자 중 청년 비율도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해 지난해에는 7.43%까지 올라갔다.

전문가들은 열악한 일자리와 가계부채를 배경으로 꼽는다. 지난달 청년 고용률은 42.2%로 하락했고, 올해 1분기 가계부채는 1,611조3,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취업난에 가계부채까지 급증하며 청년들의 취업 ‘하향지원’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다”면서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경향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 사태와 청년들의 단순노무직 취업 간 연관성을 다룬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현장에서는 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난해 말 지역 공기업 무기계약직에 조건부 합격한 인천 남동구 주민 성병우(가명ㆍ28)씨도 그렇다. 코로나19로 인해 7개월째 취업이 연기됐다. 성씨는 반년 가까이 건설현장에서 자재를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집에 수천 만원의 부채가 있어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의 한 건설현장 관계자도 “코로나 사태 이후 20대들의 단순노무직 지원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배민라이더스 남부센터에서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뉴스1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배민라이더스 남부센터에서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뉴스1

◇경력 쌓아도 남은 게 없어…“어디로 가야 하죠”

비정규직으로 다년간 경력을 쌓다가 단순노무직으로 이동한 경우도 적지 않다. 경기 안산시에 사는 이창명(가명ㆍ28)씨는 군 전역 뒤 6년간 경호 업계에서 일했다. 몸집이 커서 유리했고, 유명인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일도 적성에 맞았다. 그러나 이씨는 반복되는 임금 체불을 견디지 못하고 2년 전 업계를 떠났다. 그는 “원ㆍ하청이 임금 지불 책임을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시스템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이씨는 충남 천안시의 한 물류창고에서 문틀과 문고리 등을 나르는 단순노동을 하고 있다.

20대를 계약직 주방장으로 보낸 서울 강서구민 최병수(가명ㆍ31)씨는 30대 초반에도 단순노무직에 머물러 있다. 최근엔 동네 슈퍼마켓에 배달원으로 취업했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 1,000만원 등 가계부채 5,000만원이 최씨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는 “하루 평균 12시간을 일하고 퇴근하면 자정이 넘도록 멍하니 있는다”며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명확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단순노무직 자체를 부정적으로 봐선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일과 삶의 균형 등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선택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 4월 아르바이트 소개 업체 알바몬 설문조사에서 취업을 준비하지 않는 단순노무 종사자 가운데 79.5%는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답했다. 자발적으로 단순노무직에 취업한 비율은 매우 낮고, 대부분 비자발적 취업이란 의미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빈곤의 악순환을 우려한다. 일자리는 자산과 더불어 지위 상승의 주요 수단인데, 단순노무직으로는 부의 재생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단순노무직은 저임금 노동인데다 오래 종사해도 숙련도가 높아져 부가가치가 오를 수 없는 노동”이라며 “청년들이 비자발적으로 단순노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노동시장에는 매우 부정적 신호”라고 말했다.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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