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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엔] 도대체 무슨 뜻? 입주민도 모르는 아파트 이름

입력
2020.02.27 04:30
수정
2020.02.27 07:2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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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을 내건 아파트가 범람하고 있다. 좋은 의미를 담은 단어를 마구잡이로 조합한 결과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한글로 주소를 적을 때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막막하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로 말하기 민망하다. 서울시내 그 뜻을 알기 어려운 아파트 단지 이름을 모았다.
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을 내건 아파트가 범람하고 있다. 좋은 의미를 담은 단어를 마구잡이로 조합한 결과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한글로 주소를 적을 때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막막하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로 말하기 민망하다. 서울시내 그 뜻을 알기 어려운 아파트 단지 이름을 모았다.

루센티아, 그라시움, 아르테온, 루체하임, 블레스티지, 리센츠, 트리지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인터넷 검색을 시도해 봤지만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단어들, 모두 3.3㎡(평)당 가격 2,500만원이 넘는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있는 아파트 ‘래미안 DMC 루센티아’. 해석을 시도해 봤다. ‘래미안’은 시공사인 삼성물산의 아파트 브랜드이고 ‘DMC’는 디지털미디어시티(Digital Media City)의 약자다. 언론사와 방송국 등이 모여 있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주변을 뜻하는데 남가좌동과는 거리가 상당하다. 가장 아리송한 부분은 세 번째 ‘루센티아(Lucentia)’. 삼성물산의 설명에 따르면 은은하게 빛난다는 뜻의 ‘루센트(Lucent)’와 중심을 뜻하는 ‘센터(Center)’, 휘장을 의미하는 ‘인시그니아(Insignia)’를 결합한 신조어다. 우리말로 풀어 보면 ‘중심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휘장’ 정도다.

이 같은 ‘깊은 뜻’을 주민들은 알고 있을까. 입주 예정인 정모(48)씨는 “2017년 분양광고를 통해 처음 봤을 때부터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면서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뜻은 아닐 테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국토교통부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을 통해 2월 현재 서울에 등록된 2,422개 아파트 단지 명칭을 해석해 본 결과 그 의미를 명쾌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100여곳에 달했다. 이들 단지 명칭의 공통점은 외국어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각각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조합했다는 점이다.

영어 단어를 2개 이상 조합해 만든 아파트 이름.
영어 단어를 2개 이상 조합해 만든 아파트 이름.

예를 들면, 축복을 뜻하는 ‘블레스(Bless)’와 위신을 뜻하는 ‘프레스티지(Prestige)’를 합해 ‘블레스티지(Blesstige)’를 만들어 내는 식이다. 왕을 의미하는 ‘렉스(Rex)’와 성을 의미하는 ‘캐슬(Castle)’을 붙여 ‘렉슬(Rexle)’이 되고, 강이라는 뜻의 ‘리버(River)’와 최고를 나타내는 ‘제니스(Zenith)’가 만나 ‘리버젠(Riverzen)’이 탄생하기도 한다.

영어 외에 다국적 언어가 소환되기도 한다. ‘루체하임’은 빛을 뜻하는 이탈리어 ‘루체(Luce)’에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Heim)’을 붙인 경우다. ‘그라시움’은 우아하다는 뜻의 영어 ‘그레시어스(Gracious)’에 공간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움(um)’이 결합됐다. 이 같은 조합으로 탄생한 국적 불명의 단어들이 사전에 나올 리 없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어 프랑스어 라틴어가 조합돼 탄생한 아파트.
영어 독일어 이탈리어 프랑스어 라틴어가 조합돼 탄생한 아파트.

그렇다면 대체 이런 기상천외한 ‘작명술’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아파트 단지 이름과 규모, 입주 시기를 종합해 본 결과 서울 시내 아파트 재건축이 본격화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붐이 일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송파구 잠실 일대 주공아파트 재건축이 추진됐는데, 1개 단지가 5,000세대가 넘을 정도로 대규모이다 보니 다수의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시공을 해야 했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건설사마다 아파트 브랜드를 각각 가지고 있었으나 단지가 하나이다 보니 새로운 이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트리지움(III-zium)’ ‘리센츠(Ricenz)’ ‘엘스(LLLs)’였다. 트리지움은 주공3차(IIIㆍ트리) 아파트를 재건축했다는 의미에 쇼핑, 문화, 교육을 뜻하는 ‘뮤지엄(Museum)’과 기둥이라는 뜻의 ‘칼럼(Column)’을 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센츠의 경우 ‘리버(River)’ ‘센터(Center)’ ‘제니스(Zenith)’를 조합했고, 엘스는 생활을 즐긴다는 의미의 ‘리빙(Living)’과 문화를 사랑한다는 ‘러빙(Loving)’, 시대를 리드한다는 뜻의 ‘리딩(Leading)’의 앞 글자를 모았다고 한다.

기상천외한 작명술의 시초로 보이는 서울 잠실의 대표적 재건축 아파트.
기상천외한 작명술의 시초로 보이는 서울 잠실의 대표적 재건축 아파트.

그 후에도 이 같은 작명 방식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래미안 DMC 루센티아처럼 건설사의 고유 브랜드 뒤에 단지마다 새로운 이름을 추가하는 방식이 대세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재건축 아파트의 경우 주로 조합에서 이름을 결정하는데 최근에는 공모를 거친 뒤 조합원 투표를 거쳐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름을 정할 때 보유자(주민)의 만족도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전했다.

아파트 단지 이름이 주택 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국내 연구는 아직 없다. 아파트 가격은 여전히 입지 조건과 교통, 학군이 좌우하고 이름은 ‘기분’일 뿐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문소연 이동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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