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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테베는 어떻게 죽음을 불사하는 무적 부대를 거느렸나

입력
2020.02.08 04:40
수정
2020.02.08 21:5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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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카이로네이아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이 맞붙은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한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1814). 영화 ‘300’의 소재로도 유명한 이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테베군은 그림 속 주인공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끈 스파르타군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용맹하고 싸웠다. 100여 년 뒤 테베는 동성연인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헤로스 로코스(신성대)’를 앞세워 그리스 패권을 장악한다. ⓒ위키피디아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이 맞붙은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한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1814). 영화 ‘300’의 소재로도 유명한 이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테베군은 그림 속 주인공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끈 스파르타군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용맹하고 싸웠다. 100여 년 뒤 테베는 동성연인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헤로스 로코스(신성대)’를 앞세워 그리스 패권을 장악한다. ⓒ위키피디아

기원전 338년, 필립 2세가 지휘하는 3만2,000명의 마케도니아군은 보이오티아의 마을 카이로네이아에서 비슷한 숫자의 테베-아테네연합군과 마주했다. 테베는 그리스 동남부 아티카의 북쪽에 위치한 보이오티아의 중심 도시였다. 보이오티아의 북쪽은 테살리아, 테살리아의 서쪽은 에피로스였고, 테살리아의 북쪽에 마케도니아가 자리잡았다. 올림픽을 상징하는 올림포스산은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의 접경 지대에 위치했다.

농업을 주로 한 테베는 해상무역으로 돈을 버는 아테네보다는 자신들과 비슷한 스파르타를 더 가깝게 느꼈다. 기원전 404년에 끝난 펠로폰네소스전쟁 때만 해도 스파르타의 우방이었던 테베는 기원전 395년에 시작된 코린토스전쟁에서는 스파르타에 대항해 싸우기 시작했다. 막강한 스파르타의 육군을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코린토스연합군은 기원전 387년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가 조약을 맺으면서 사실상 패배했다. 테베는 기원전 378년 스파르타와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그리스 전체의 헤게모니를 가진 스파르타에 테베가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그리스 패권 쟁탈한 테베

스파르타군은 테베가 상대하기 버거운 군대였다. 이전까지 중장보병인 호플리테로 구성된 밀집방진, 즉 팔랑크스 간의 대결에서 스파르타군을 이긴 그리스군대는 없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치른 테르모필레전투에서 보여준 스파르타군의 강력함은 전설이 되었다.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300명의 스파르타 호플리테는 포위되지 않는 한 정면대결에선 무적임을 증명했다. 테르모필레전투에서 테베군 400명은 최후까지 스파르타군과 함께 하다가 마지막에 페르시아군에게 항복했다.

스파르타-테베전쟁 8년째인 기원전 371년, 테베군은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군을 만났다. 기병 수에서 1,500명 대 1,000명으로 앞섰지만 호플리테는 7,000명 대 1만명으로 확실한 수적 열세였다. 에파미논다스가 지휘하는 테베군은 통상적으로 우익이 앞장서는 팔랑크스간의 전투 양상을 이용해 자신의 좌익을 극단적으로 강화하고 먼저 전진시켜 스파르타군 정예 우익을 무릎 꿇렸다. 무패를 자랑하던 스파르타군은 심리적으로 붕괴된 나머지 등을 돌려 도망가다 학살됐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군을 지휘하던 왕 클레옴브로토스도 죽었다.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군의 패배에 깜짝 놀랐다. 레욱트라전투 후 테베는 그리스의 지배자로 올라 섰다.

◇엘리트부대 창설로는 부족하다

레욱트라전투에서 테베군 승리의 원인 중 한 가지로 펠로피다스가 이끈 테베군의 특수부대가 지목됐다. 신성한 부대로 번역되는 헤로스 로코스, 이른바 ‘신성대’는 테베군의 최정예 엘리트부대였다. 신성대를 구성하는 300명은 한 명씩 특별하게 선발된 병사들이었다. 신분에 무관하게 오직 능력과 우수성에 의해서만 선발된 신성대원들은 레욱트라전투 때 테베군의 좌익 최선봉에서 스파르타군을 무너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스파르타군을 꺾은 신성대의 명성은 불사신에 비견될 정도로 올라갔다.

배수진이나 화려한 군복이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려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엘리트부대 창설은 적극적인 방법에 속했다. ‘너희는 특별하다’ 혹은 ‘너희는 남다르다’는 생각을 주입시켜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19세기 프랑스 군인 아르당 뒤 피크는 잘 준비된 적 방어선을 향해 공격부대가 대열을 지켜가며 질서정연하게 끝까지 진격하는 일은 신화에 가깝다고 역설했다. 실제는 다음의 둘 중 한 가지였다. 공격병력이 끝까지 돌격해올 거라고 믿은 수비병력이 겁에 질려 미리 도망가거나 혹은 수비병력이 끝까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믿은 공격병력이 겁에 질려 미리 도망가는 경우였다. 특정 부대에게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는 일은 전투에서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엘리트부대의 창설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엘리트로 치켜 세우면 나머지는 저절로 비엘리트로 전락했다. 비엘리트로 간주되는 병사들이 전력을 다해 싸울 리는 없었다. 또한 군의 대다수 비엘리트 병사의 사기 감소가 소수 엘리트 병사의 사기 증가보다 오히려 더 클 수 있었다. 나아가 엘리트부대가 적에게 패하면 ‘저 잘난 애들도 졌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기나’라는 회의감에 싸우기도 전에 부대가 와해되기도 했다. 서열과 계급을 강조하는 방법은 전체의 관점으론 언제나 소탐대실에 가까웠다.

◇‘임전무퇴’ 테베 신성대의 비밀

엘리트부대의 창설보다 세련된 방법은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 혹은 명예를 강조하는 방법이었다. 병사 개개인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대보다 더 강한 군대는 있을 수 없었다. 이는 쉽지 않은 목표였다. 한 사례로서, 스코틀랜드 북단 오크니제도의 바이킹 족장 시구르드에게는 ‘휘날리는 한 부대는 언제나 전진하지만 대신 들고 있는 자는 죽는다’는 까마귀 그림 깃발이 있었다. 아일랜드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와 맞붙은 클론타르프전투에서 첫 번째 기수와 두 번째 기수가 연달아 죽자 아무도 세 번째 기수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시구르드는 심지어 부하 한 명을 지목해 기를 들라고 명령했지만 거부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시구르드는 직접 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해 부대를 전진시켰지만 본인은 전사했다. 더 이상 아무도 기를 들려고 하지 않은 바이킹부대는 결국 전투에 지고 말았다. 용감한 바이킹조차 죽음을 무릅쓰는 군인의 수는 세 명까지였다.

테베의 신성대는 죽음을 무릅쓰는 명예를 기묘한 방식으로 달성하려 한 부대였다. 이들은 사실 150쌍의 동성 연인이었다. 보다 나이가 많은 대원인 에라스테스, 즉 ‘사랑하는 자’가 지목한 젊은이가 에로메노스, 즉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 두 명이 커플로서 전투에 참가하는 구조였다.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는 연인을 두고 혼자 도망칠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 연인이 죽거나 다치면 복수심에 불타올라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상대방은 맹목적으로 싸우는 신성대의 모습에 공포심을 느끼곤 했다. 신성대에게 후퇴란 없었다.

그리스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테베는 주변 도시국가들을 거칠게 다뤘다. 원래 아테네 영향권에 속했던 플라타이아를 점령한 후 되돌려 달라는 아테네의 요구를 묵살했고, 스파르타의 본거지인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했으며, 북쪽의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공격해 인질을 잡았다.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의 막내 아들 필립 2세는 15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서 테베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필립 2세는 테베군의 여러 전술을 몸소 보고 익혔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립 2세는 펠로피다스의 에로메노스였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신성대

테베가 폭주하자 나머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연합해 테베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코 한편이 될 것 같지 않던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손을 잡기까지 했다. 필립 2세가 인질생활에서 풀려난 지 1년 후인 기원전 364년 키노스세팔라이전투에서 신성대는 테살리아군을 이겼지만 펠로피다스는 전사했다. 에라스테스를 잃은 필립 2세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5년 후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다. 기원전 362년 테베군은 만티네아전투에서 스파르타-아테네연합군을 이겼지만 에파미논다스가 죽었다. 테베의 헤게모니는 위축됐고, 손실이 컸던 스파르타와 아테네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전투 때 필립 2세의 나이는 45세였다. 필립 2세는 그 기간 동안 펠로피다스에게 배운 테베군과 신성대의 전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호플리테가 사용하는 장창의 길이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고, 팔랑크스의 규모도 네 배로 키웠다. 자신들의 장점을 고스란히 흡수해 진화한 마케도니아군은 테베의 신성대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필립 2세의 아들이 지휘하는 별동대가 신성대의 방진을 무너트리면서 테베-아테네연합군은 완패했다. 후퇴를 모르는 신성대는 전멸당했다.

필립 2세의 승리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뒤따랐다. 어두운 면으로 카이로네이아전투 2년 후인 기원전 336년, 페르시아 침공을 준비하던 필립 2세가 딸의 결혼식에서 경호원에게 암살됐다. 필립 2세의 에로메노스였던 경호원이 버림 받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 필립 2세를 죽이고 말았다. 밝은 면으로는 신성대를 허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아들의 이름은 알렉산더였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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