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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당신의 런던] 인간과 자연이 서로 치유받는 곳- 민와일 야생정원

입력
2019.08.31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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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축소판’ 같은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런던의 이야기를 <한국일보> 가 3주에 한 번씩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런던에서 유학 중인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이 그려내는 생생한 런던 스토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국 런던의 유명 골동품 시장인 포토벨로 마켓 인근에 있는 ‘민와일 야생정원’의 입구.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을 상대로 한 원예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곳으로, 정원 내 동식물을 가꾸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나가는 ‘치유의 공간’이다.
영국 런던의 유명 골동품 시장인 포토벨로 마켓 인근에 있는 ‘민와일 야생정원’의 입구.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을 상대로 한 원예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곳으로, 정원 내 동식물을 가꾸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나가는 ‘치유의 공간’이다.

“방금 왕거미 한 마리를 펜트하우스로 옮겼어요. 구경하실래요?”

자신을 미키라고 소개한 중년의 정원사가 정원 한구석으로 안내했다. 나무 판자와 벽돌 등이 뼈대를 이루고, 구멍마다 건초를 끼워 넣은 커다란 육면체가 놓여 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곤충호텔’이라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이는 곤충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그렇게 모여든 곤충들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번성시키는 일종의 원예 기술이다.

미키가 사각형의 건초더미를 들어내자, 왕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이 5성급 호텔에 100마리도 넘는 손님(곤충)들이 머물고 있다”면서 “겨울에는 밖보다 온도가 훨씬 높아 가히 ‘인섹-토피아’(곤충을 뜻하는 인섹트와 유토피아의 조어, 원래 존재하는 단어는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고 능청을 떨었다.

민와일 야생정원(Meanwhile Wildlife Garden). 런던의 유명 골동품 시장인 포토벨로 마켓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 한적한 야생정원에는 미키와 같은 정원사 열 다섯 명이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주변을 가꾼다. 나이와 성별, 인종이 다양한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마음 한 켠이 고장 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국 건강당국인 NHS에 따르면 영국인 여섯 명 중 한 명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 수치는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3개월 차 정원사인 미키도 인근 공립병원에서 ‘2차 진료(Secondary Care)’ 대상자로 분류돼 민와일에 왔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2차 진료는 만성 우울증이나 약물 중독, 다중인격 등 질환 정도가 다소 심해 전문의의 상담이 요구되는 경우다.

이곳에는 미키 외에도 대학 연구원으로 일하다 심한 불안증세 때문에 아마추어 목수가 된 40대 여성, 신의 지령을 받아 자신이 우주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 50대 남성 등이 함께 정원을 돌보고 있다. 모두 정신건강 관련 자선단체 ‘마인드’에서 운영하는 ‘도시와 길드’ 프로그램 참가자들로, 1년 과정을 마치면 원예사 자격이 부여된다. 단체는 단순히 ‘에코테라피’를 뛰어넘어 사회 자립을 위한 직업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손으로 땅을 만지며 일하면 생각을 덜 하게 됩니다. 신체적으로 피곤하니까 불면증 같은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죠.” 민와일 야생정원의 디나 케스턴번 야생지도사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과정에 전통적 개념의 치료행위는 거의 없다. 참가자들이 다른 참가자 및 지역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이 가장 큰 치료다. “정원을 가꿔 줘 고맙다는 방문객들의 말이 이들의 자존감을 높여 줘요. 원예는 고립된 사람들을 실외로 유도하고, 지역사회에 녹아들게 하죠.”

민와일 야생정원의 덕을 보는 건 이 프로그램 참가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민들도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정원은 저소득층 인구밀도가 높은 북(北) 켄싱턴에 있다. 곳곳에 공원이 있는 다른 런던 지역과 달리 녹지가 부족한 지역이다. 디나 지도사는 이곳 주민들에게 민와일은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숲에 들어서면 온도가 2도 정도 낮아 여름이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민와일 야생정원의 자랑거리는 또 있다. 동시대 도시의 공원들과는 달리 영국 토종식물만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한때 영국에서 가장 흔했던 참새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가운데, 2006년에는 켄싱턴첼시구에서 유일하게 참새가 목격된 곳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민와일 일대는 버려진 불모지였다. 캐리비안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밀집했던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동네 중 하나였다. 밥 말리와 같은 예술가들의 본거지였고, 마약 거래로도 악명이 높았다. 오래 산 주민들은 아직도 일대를 우회할 정도다.

변화는 1993년 자선단체 ‘마인드’가 이 일대를 접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단순 재활활동에 불과했다. 이들은 파괴된 집들에서 나온 각종 쓰레기를 치우고, 연못을 파고 울타리를 만들었다. 빈 땅에는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토종 식물들을 수년 동안 심고 가꿨다.

해충제와 같은 화학 비료도 일절 쓰지 않았다. 곤충호텔에 사는 곤충들이 꽃의 수분을 담당해 숲을 더 푸르고 무성하게 만들었다. 현재도 정원은 울타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못과 새장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이땅에서 발견되는 나뭇가지 등을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가꾸고 있다.

단체에 따르면 지금까지 3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도시와 길드’ 과정을 수료한 환자는 지난 12년 동안 100여명에 이른다.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2차 진료’가 필요한 중증환자였지만 졸업 뒤에는 사회로 나간 경우도 적지 않다.

단체 ‘마인드’의 데이빗 스코필드 국장은 “어떤 학생은 졸업 뒤 영국왕립식물원 수습생으로 뽑히기도 했다”면서도 큰 성과만을 성공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누구든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면 다 성공”이라는 것이다.

민와일을 번역하면 ‘그러는 동안’이다. 이 이름처럼 민와일 야생정원의 시간은 사람과 동식물의 자연스러운 들고 낢으로 채워져 있다. 불완전한 것들이 서로 치유받고 성장해 나간다.

이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는 나자르 엘루비(49)는 로트와일러 두 마리와 함께 매일 오후 민와일을 산책한다. 그는 “여기 정원사들을 보며 마음의 병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고 했다.

“언젠가 제 차례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지원 또한 여기에 있다는 걸 알잖아요.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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