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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몰랐던 한 여자… ‘엄마 자서전’ 쓰는 아들 딸들

입력
2019.04.13 09:00
수정
2019.04.13 09:5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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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사진 보며 대화 끌어내니, 손사래치던 엄마도 이야기 술술 

 과거 복원하며 이해 커져… 사회적기업 ‘허스토리’가 제작 도와 

부모님의 옛 사진을 보고 있자면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내가 그 시절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사실. 김혜영 기자
부모님의 옛 사진을 보고 있자면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내가 그 시절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사실. 김혜영 기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건 옛 사진 한 장이다. 흑백사진 속 여인의 꼭 다문 입매가 다부지다. 알맞은 각도로 눌러 쓴 베레모, 무릎을 덮는 클래식 코트, 단정하게 둘러맨 벨트. 마음먹고 차림새를 갖춘 채 렌즈 앞에 선 까닭이 궁금해지는 모습이다. 촬영 당일 사연이 쏟아질 것만 같은 사진의 배경을 유추하는 데 관찰자들의 온 집중력이 쏠려 있었다.

사진을 들고 온 마을활동가 김명철(38)씨가 일종의 단서를 슬쩍 내밀었다. “제가 이 모자랑 옷을 다른 컬러 사진에서도 봤는데 녹색이에요. 밝은 녹색. 이런 녹색 베레모에 코트를 쫙 빼입고 이 시대에 프로필 사진 같은 걸 촬영했다는 걸 보면, 당시에 정말 자의식이 강했던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이 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했다. 늘 헐렁한 차림으로 가족의 끼니를 챙기느라 분주했던 ‘엄마’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가 그것 같아요. 엄마에게도 자기 정체성이, 자의식이,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 이야기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점. 내가 이제껏 몰랐던 것들이 뭔지 궁금하다. 그런 관심이 이제서야 밀려든 거죠.”

지난달 23일 서울 관악구 소재 서점 ‘달리 봄’ 한쪽에 마련된 티테이블에선 각자가 품고 온 ‘엄마 사진’ 관찰이 한창이었다. 소셜벤처(사회적기업) ‘허스토리’가 마련한 ‘내가 만드는 엄마의 자서전’ 워크숍의 한 과정이다. 궁극적 목표는 각자 아마추어 구술 생애사 작가가 돼 엄마의 자서전을 완성하는 것. 이를 위한 인터뷰 준비 과정이자 사전 계획의 첫 걸음이 시작된 터였다.

창 밖의 아직 차고 시린 바람과 잔잔히 내리는 봄비를 뚫고 서점에 들어선 대여섯 청장년들이 각자 엄마 사진을 가만히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의 사진을 응시하는 생경함, 당시 엄마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막연함, 그 다채로운 시절에 비하면 부쩍 창백해진 현재 엄마 모습에 대한 애잔함. 각각의 감정 뭉치가 만든 침묵이 작은 서점 안에 가득 내려 앉았다.

가만한 집중이 이어지자 류소연(30) 허스토리 대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적막을 깼다. “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더, 제대로 알고자 합니다. 낯설게 느껴지시죠. 떠오른 것들을 글로 적으며 생각을 다듬어 보세요. 다양한 질문을 미리 끄집어내 보면, 각자 인터뷰할 때 더 풍성한 대화가 가능하겠죠.”

각자의 노트 위에 엄마를 적어가면서 서점은 더 깊은 적막에 사로잡혔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연필을 까딱까딱 흔들고, 미간을 찌푸려봐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자각만이 선명해진다. 자식인 나도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내가 안 써두면 대체 어디에 남는단 말인가. 미처 기록되지 못한 인류, 그 가운데 우리 엄마를 복원하겠다는 시도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23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서점 '달리 봄'에서 열린 허스토리의 '그 여자의 자서전, 내가 쓰는 엄마의 역사'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김혜영 기자
23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서점 '달리 봄'에서 열린 허스토리의 '그 여자의 자서전, 내가 쓰는 엄마의 역사'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김혜영 기자

워크숍을 기획한 허스토리는 두 역사학도가 세운 사회적 기업이다. 자서전 출판과 관련 교육, 서점 운영 등을 해나간다. 류소연 대표, 주승리(27) 팀장이 각각 구술 생애사 방식으로 할머니와 엄마의 자서전을 쓴 경험을 계기로 여성들의 자서전을 제작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구술사 기록은 주로 문헌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인터뷰를 통해 수집하고 해석하는 질적 연구 방법이다. 기존의 역사에서 누락되기 쉬운 여성, 노인, 지방민, 소수자의 역사를 복원할 때 자주 쓰인다.

◇ 묻기 시작하니, 비로소 복원됐다

주 팀장은 직접 엄마의 자서전을 만들면서 “엄마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을뿐더러, 눈물 흘리는 모습도 처음 봤다”라며 “더 많은 어머니가 기록돼야 한다는 생각, 또 이 개개인의 역사가 만드는 더 큰 여성의 역사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지게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그가 엄마 신은영(54)씨에게 온갖 질문을 본격적으로 쏟아낸 것도 자서전을 쓸 때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왜 어릴 때 사진이 없어?”, “아빠랑 결혼하고 나서 어땠어?”, “엄마는 언제부터 절에 다녔어?”

엄마는 그제야 비로소 경제적으로 한참 어렵던 옛 시절, 마지막 선택으로 향했던 서초동 비닐촌 1.5평 이야기를 풀어냈다. 비닐로 얼기설기 만든 구조물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밤만 되면 여기저기 불이 나던 ‘전쟁 같은’ 시절이었다. “이제 막 태어난 자식을, 가난도 서러운데 불 속에서 죽일 수 없다는 판단에 전셋돈을 모아 인천으로 이사했지. 그때 느그 아빠가 제일 미웠고 나도 미웠어. 부모도 원망했고 세상도 원망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조그마한 미소라도 머금게 하고, 악착같이 살아남도록 한 두 자식이 있었지.”

주 팀장은 “많은 어머니가 처음에는 ‘나는 할 말이 없어’, ‘내 삶엔 별로 기록할 게 없어’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묻고, 듣고자 할 때서야 비로소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더라”며 “기록되지 않으면 스스로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데, 누락돼 있는 엄마들의 수많은 경험과 감정은 더 많이 되살리고 말해져야 할 역사”라고 설명했다.

류 대표는 1933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난 외할머니의 자서전을 썼다. 16세에 피란을 오다 부모님과 헤어진 외할머니의 생애를 기록해 나가면서 그는 궁금했다. 권력이나 공적, 소속 기관에서의 커리어가 없는 어머니들의 삶. 아무도 어떤 형태로도 기록하고 있지 않은 이들의 인생은 이대로 흩어져도 좋은가. 그 생애가 가족이나 가정을 기반으로 피어올랐던 이들의 역사는 단지 할머니, 엄마라는 이름으로 납작하게 기억되는 게 옳은가. 류 대표와 주 팀장이 더 많은 ‘엄마의 자서전’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주승리 팀장과 류소연 대표는 "여성의 시선으로 작은 역사를 쓰고자 한다"며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거기에 있는 그녀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게 목표"라고 했다. 김혜영 기자
주승리 팀장과 류소연 대표는 "여성의 시선으로 작은 역사를 쓰고자 한다"며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거기에 있는 그녀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게 목표"라고 했다. 김혜영 기자

“혹시 ‘아빠는?’ ‘왜 엄마만 기록해 줘?’라는 질문 안 받나요”라고 물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보를 터트린다. “초기에 제일 많이 받았죠.” 소셜벤처 설립을 자문하던 조언가 그룹에서부터 그런 의문이 제기됐다는 거다. “저희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자서전 제작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물론 아버지의 삶 역시 당연히 기록될 가치가 있죠. 하지만 굳이 비교를 해봤을 때, 자신의 삶이 기록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생애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준비가 덜된 분들, 누락이 더 많이 된 이는 엄마였어요. 내 아버지 역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분이라 생각되면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의 역사를 적어 볼 수 있겠죠.”

◇ 늘 ‘죄책감’ 언급하는 엄마들

두 사람이 자서전 쓰기의 도구 즉, ‘그 여자의 자서전, 내가 쓰는 엄마의 역사’ 가이드북과 워크북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말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온갖 엄마들, 살아온 이야기 좀 들려 달라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온 동네 엄마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끄집어낼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류 대표는 “누구나 열어 놓고 싶지 않은 자기 내면이 있고, 특히 자녀에게는 더 그럴 수 있는 만큼 큰 부담 없이 생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장치들을 많이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이나 소장품을 기반으로 한 인터뷰’도 그 대표적 예다.

각자 엄마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옛 사진을 매개로 다양한 질문을 적어 보던 참가자들은 ‘새로운 경험’이라고 입을 모았다. 엄마와 사이가 늘 좋지만은 않았다는 한 20대 참가자는 엄마의 사진을 응시하다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저희 엄마는 참 ‘누군가를 잘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에요. 친척들과 찍은 사진을 봐도 늘 애들은 저희 엄마가 안고 있고. 그 모습도 온몸으로 그 사람을 안고 있는 느낌이에요. 잘 꾸미지도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지만 다시 가서 여쭤보고 싶어요.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뭐였는지.”

워킹맘 김연지(46)씨도 사진 속 엄마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아빠와 어색한 표정의 엄마가 대조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늘 밝고 활기찬 친척들 사이에서 내성적인 엄마가 조금은 어색하고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면 바닷가로 온 친척들이 나들이를 가곤 했는데, 신나게 놀다가도 문득 ‘엄마도 재미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바라보기도 하고, 걱정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우리에겐 잔치였던 일상이 엄마에겐 노동이고, 관찰이고, 이방인의 입장이었던 순간이 많았던 거죠.”

어려서부터 늘 엄마와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는 그도 최근 들어 조금은 마음이 급해졌다. “예전엔 아빠와 연애 시절이 애틋했다고 하시던 엄마가 최근 들어 다시 여쭤보니까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기억 속에서도 옛일들이 점점 희미해지는가 봐요. 더 잊어버리기 전에 엄마와 아빠에 대한 사소한 많은 것을 기록하고 싶더라고요.”

듣고 있던 류 대표는 “그런 맥락을 읽어낸다는 게 큰 의미이자 성과”라고 첨언했다. “다른 사람은 기억하거나 발견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맥락까지도 딸로서, 아들로서 읽어내고 써둘 수 있다는 게 남다른 기록이 될 수 있잖아요. 또 사진이 정말 개인적인 소재 같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소하지만은 않은 공통 맥락이 드러나거든요. 이걸 세상에 꺼내놓았을 때 얻는 효과도 실재하고요.”

앞서 여러 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들이 발견한 공통 맥락은 ‘죄책감’이다. 주 팀장이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버지들은 바깥, 즉 직장에서의 성공에 집중해 본인의 생애에 대해 말씀하시는 반면, 대부분 어머니는 본인이 직접 보험 일이나, 사업, 식당 등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진 경우에도 ‘애들을 못 챙겨줘 미안하다’, ‘집안일을 잘 못 돌봐 미안하다’ 등 죄책감을 표현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끊임없이 일해왔는데도 그 일이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강했고요.”

자서전 속 엄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주승리 팀장. 김혜영 기자
자서전 속 엄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주승리 팀장. 김혜영 기자
자서전 속 외할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류소연 대표. 김혜영 기자.
자서전 속 외할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류소연 대표. 김혜영 기자.

더 많은 엄마 자서전의 탄생을 통해 꿈꾸는 허스토리의 목표는 이런 이유로 축소된 엄마, 여성의 이야기를 꾸준히 써내 세상을 더 시끄럽게, 더 풍성하게 만들고 여성들을 자기 서사를 지닌 주체로 바로 세우는 일이다. 류 대표는 “이야기는 자기 존재의 모습이 드러나는 통로”라며 “조바심 내지 말고 조금씩 누군가의 삶을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지니는 것도 좋은 자서전 쓰기 인터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시간에 걸친 워크숍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들고 온 사진과 좋은 인터뷰를 위한 당부를 품에 안고 서점을 나섰다. 찬 봄비 속으로 흩어지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직업이 기자, 기록하는 사람이랍시고 다니면서도 정작 질문해 본 적 없던 삶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이날 새로 배운 질문을 곱씹었다. 조바심을 내지 말랬지만 질문이 늘어가는 속도만큼 걸음은 계속 빨라졌다. “엄마, 살면서 가장 외롭다고 느꼈던 때는 언제야?” “엄마는 언제 고향이 가장 그리워요?” “처음부터 다시 살 수 있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건 뭐예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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