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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경제인] ‘벽화 로봇’ 아이디어로… “빚더미서 기적을 그려냈죠”

입력
2019.01.01 04:5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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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불자서 글로벌 사업가로, 박정규 로보프린트 대표

사업실패 6년 만에 벽화 그리는 로봇 ‘아트봇’ 개발 재기

[저작권 한국일보] 박정규 로보프린트 대표가 자신이 개발한 ‘아트봇’으로 대구 출신 항일운동가 이육사 이상화 등의 대형 벽화를 그린 아파트 앞에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재기한 인생 스토리를 얘기하고 있다. 김혜윤 인턴기자/2018-12-26(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박정규 로보프린트 대표가 자신이 개발한 ‘아트봇’으로 대구 출신 항일운동가 이육사 이상화 등의 대형 벽화를 그린 아파트 앞에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재기한 인생 스토리를 얘기하고 있다. 김혜윤 인턴기자/2018-12-26(한국일보)

편집자 주: 2019년엔 한국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성공한 이들의 혁신 이야기를 통해 새해의 희망을 찾는 기획물을 총 5회 싣습니다.

“실패(Fail)는 기적의 신호(signal of miracle)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목표에 다다르는 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부모 없이 지방대 16년 다니다 사업실패하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뒤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인생을 반전, 역전시킬 수 있었다. 돈 없고, 아이디어가 완벽하지 않은 당신도 얼마든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최근 대구에서 만난 박정규(49) 로보프린트 대표는 곧 바로 대구지하철 3호선 수성구민운동장역 인근의 준공 30여년 된 아파트 ‘궁전맨션’으로 안내했다. 15층 높이 아파트 건물 3개동 벽면엔 대구 출신 항일운동가인 이육사, 이상화, 서상돈 선생이 폭(가로) 12.5m, 높이(세로) 50m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아파트 옥상에 고정된 밧줄(로프)에 의지한 채 작업자가 천천히 내려오며 페인트를 칠하는, 위험 천만한 기존 작업 방식으로 그려진 게 아니다. 바로 박 대표의 로보프린트가 개발한 ‘벽화 그리는 로봇’(아트봇)의 작품이다. 로보프린트를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아파트 벽화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지난 2014년 9월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청포도’(이육사) 등 벽화 주인공들이 남긴 시나 문학작품, 그리고 이들의 일대기를 크기와 서체가 다른 글자로 써내려 가면서 인물을 모습을 형상화하는 ‘텍스트 픽처(Text Picture)’ 기법으로 완성됐다. 사람이 하기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작업이다.

당시 대구 도시경관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던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로보프린트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됐다. 아트봇은 이제 대구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칙칙하고 삭막한 잿빛 건물을 아름답게 변신시키는 주인공이 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GS건설 코오롱글로벌 등 국내 유수기업은 물론 미국 싱가포르 중국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러시아 베트남 등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

박 대표는 “국내 페인트 제조 및 도색 관련 업체 4,000여개 중 ‘로봇 시스템을 이용한 구조물 도장공법(아트봇 공법)’을 사용하는 곳은 로보트린트가 유일하다”며 “국토교통부 인증 신기술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아트봇은 1m 선 안에 점(DPMㆍdot per meter) 1,562개, 1㎡ 면적엔 총 243만개의 점을 찍는다. 사람이 밧줄과 크레인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단색 도색을 하는 경우 3명이 8시간 동안 50㎡를 그릴 수 있지만 아트봇은 3대가 4시간만에 100㎡를 작업할 수 있다. 지상에서 전문가의 원격조종으로 움직이는 아트봇은 한 개 동 아파트 벽화당 4,5일이면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비용 절감과 작업시간 단축은 물론 추락사 등 인명사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박 대표는 “한때 사업이 망해 신용불량자로 은행에서 돈도 빌릴 수 없는 처지에서 아트봇 기술 개발에 매달린 지 딱 10년 만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다른 대안이 없고 너무나 절박해 페인팅 로봇 개발 하나에만 매달렸던 게 재기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두 차례 제적, 16년 만에 대학 졸업

박 대표는 경북 경산에서 빈농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과수원에서 사과와 포도를 키워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988년 그가 대학(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집안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과수원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사업하던 형이 부도로 감옥에 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군에 입대한 90년까지 3년 새 설상가상 이어진 일들이다.

93년 초 전역한 그는 군 복무 30개월 간 유예됐던 거친 현실과 마주했다. 터울이 컸던 형과 누나들은 모두 출가했던 터라 혼자였던 그는 거처할 집도 없어 친구나 선배 집을 전전해야 했다. 복학해 학업을 이어가려면 당장 돈이 필요했다. 그는 주유소 주유원, 건축현장 인부, 의류 판매영업, 이삿짐센터, 차량 운전 등의 아르바이트로 연명했다. 1년 가량 돈을 모아 복학해도 학교 구내식당 점심 값(당시 500원)이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간신히 한 학기를 마쳐도 새 학기 등록금이 필요해 다시 휴학하기를 반복했다. 96년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졸업은 ‘장기전’이 됐다. 휴학은 최대 두 차례까지만 허용됐고, 돈이 부족해 등록금을 못 내면 곧바로 제적을 당했다. 다시 돈을 모아 재입학을 신청하고, 받아들여지면 등록금에 입학금도 보태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휴학과 미등록 제적, 재입학을 반복하면서 대학을 16년이나 다닌 뒤 2004년 2월 가까스로 졸업장을 땄다. 그는 “결혼 후엔 1남 1녀를 갖게 돼 생업에 더 매달려야 했다”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식당으로 일어섰다 한 순간 신용불량자로

그는 2001년 은행 등에서 5,000만원 가량 대출을 받아 경산대 근처에 작은 맥줏집을 열었다. 아르바이트생 10명을 고용해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개업 1년 반 만에 인근의 주유소와 식당까지 인수하며 사업을 키웠다.

그러나 이때 다시 사고가 터졌다. 주유소와 식당 운영을 맡긴 직원이 1년여 동안 매출전표를 조작하고 납품업체에 줄 각종 대금까지 빼돌린 것. 미납 대금이 8억원까지 불어나자 납품업체들이 대표인 박씨를 상대로 가압류를 신청했다. 그는 독촉장을 받은 뒤에야 이러한 전말을 알게 됐다. 직원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는 2003년 말 사업을 정리해 일부 빚을 갚았지만 나머지 부채 3억원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밤낮 없이 연락해오거나 집으로 찾아오는 채권추심업자들을 견디다 못한 그는 극단적 시도를 해 보기도 했다.

당시 박씨의 아들이 폐렴으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해 치료비가 총 5만6,000원이 나왔는데, 이 돈이 없어 지인에게 빌려 간신히 퇴원시킬 정도였다. 그는 요즘 직장인 한달 월급과 비슷한 300만원을 당시 매달 이자로 내야 했는데, 이자가 연체되니 집안 가전제품이나 가구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는 생각은 절망으로 이어졌다. 그 때 그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한마디였다. 그는 “아내가 ‘돈만 없지 아직 젊고 건강하고 가족도 있으니 힘내자’고 말해 줬고 이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며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로 잡았다”고 밝혔다.

◇‘도색 로봇’ 아이디어 6년 만에 개발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 학원 통학차 운행과 신용카드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 때 곳곳에 아파트 분양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2004년 현수막 제작업에 뛰어들었다. 서울서 계약금(50만원)만 내고, 530만원짜리 중고 현수막제조기기를 들여놨다. 현수막 제작에 필요한 일러스트나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은 3일간 독학으로 익혔다. 개업하는 식당 학원이나 아파트분양회사 등을 다니며 일감을 따오던 그는 우연히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밧줄에 매달려 아파트 벽면에 페인트를 칠하는 인부를 보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도색작업을 하는 로봇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연결하긴 쉽지 않았다. 처음엔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잉크젯 프린터처럼 건물 외벽에도 유사한 방식을 도입하면 될 것 같았지만 기술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어려웠다. 프린터는 잉크를 분사하는 노즐이 있는 ‘헤드’가 좌우로 움직이고 종이가 위아래로 이동하지만, 건물 도색은 거꾸로 종이에 해당하는 외벽은 가만히 있고 분사 장치(헤드)가 움직여야 했다. 또 헤드가 벽면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이동한 뒤 한 칸(0.64~3㎜) 내려가 다시 왼쪽 끝으로 이동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했다. 그는 제어계측, 프로그래밍, 자동화기기, 양중시스템 등에 능통한 기술자나 교수 등 수 많은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조언을 얻었다. 마침내 6년만인 2010년 초 시제품을 개발했다.

먼저 아파트 옥상에 기계가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도록 와이어를 설치한 뒤 잉크젯프린터처럼 페인트를 분사하는 아트봇이 이 와이어를 타고 조금씩 내려오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 사전에 디자이너가 그려낸 벽화 초안을 관련 프로그램으로 아트봇에 입력시키면 아트봇은 잉크젯프린터처럼 건물 왼쪽에서 오른쪽 끝으로 이동하면서 페인트를 분사한다. 이어 한 칸(0.64~3.00mm) 밑으로 내려와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반복하며 작업을 한다.

그는 “이 사업이 안되면 다른 길이 없어 절박했기 때문에 버텼다“며 “기술을 잘 모르니까 누군가는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계속 궁리하다 보니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술력 인정받아 해외 러브콜도 잇따라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려니 자금이 필요했다. 이자 감당이 안돼 2007년 개인회생을 신청해 채무 일부를 탕감 받고 월 소득 중 4인 가족 최소 생계비 등을 제외한 나머지를 매달 갚고 있던 박 대표에겐 가장 큰 고민이었다.

때마침 중소기업진흥공단(중진공)이 2010년부터 신용불량자를 비롯, 실패한 사업가의 재기를 돕는 ‘재창업자금지원사업’을 마련했다. 그는 당장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자금 신청을 했지만 중진공은 아예 접수도 받아주지 않았다. 자금 회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대구로 와 시제품을 한 번만 직접 보고 판단해달라”고 계속 설득했다. 결국 중진공 담당자와 기술평가사 등 3명이 시제품을 본 뒤 “괜찮은 아이템”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중진공에서 재창업자금 1억원을 받아 그 해 12월 ‘로보프린트’ 법인을 세우고, 경일대 창업보육센터에 사무실도 차렸다.

박 대표는 “신용이 좋은 기업인은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대구시, 은행 등 여러 채널에서 자금 조달이 가능하지만, 신용불량자는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창구가 중진공 하나 밖에 없어 재기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그는 전문투자기관 한국벤처투자로부터 2012년 2억6,000만원, 2013년 3억원을 투자 받았다. 2013년에는 중진공에서 2차 재창업자금 1억6,000만원도 추가로 지원받았다.

2014년 1월 기업부설연구소를 세운 박 대표는 이미지 자동 인쇄 방법, 도색 공사 중 추락 사고 방지, 환경오염 예방 기술 등으로 국내외 특허 10여개를 획득하며 아트봇의 성능을 개량했다. 전체 직원 26명 중 연구소 인력이 20%(5명)에 달할 정도로 기술력을 강화한 덕이다.

로보프린트는 지난해 2월 강원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의 주경기장과 각 종목 경기장, 조직위원회 건물 등에도 벽화를 그렸다. 올림픽 기간 중에는 평창 정보통신기술(ICT) 체험관에서 아트봇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선보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로보프린트가 참가한 해외 박람회나 박 대표가 페이스북(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45198745671933&id=446345092223966)에 올린 아트봇과 로보프린트 소개 영상(조회수 122만회)을 보고 세계 각국에서 연락을 해오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해 5월 미국 실리콘밸리 산호세에, 8월 싱가포르에 각각 법인을 세웠다. 미국에선 현지 3대 방송 중 하나인 CBS의 7시 뉴스 헤드라인에 소개되기도 했다.

실적(매출)도 2015년 6억8,700만원, 2016년 10억7,100만원, 2017년 19억원으로 급증했다. 같은 해 처음으로 영업이익(600만원)도 내며 흑자 전환했다.

2019년엔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고,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중소기업 경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에 그 역시 걱정도 많지만 상대적으로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박 대표는 ‘자기가 얼마나 성공에 가까이 왔는지 모르고 포기하는 사람이 인생의 실패자’라는 에디슨의 명언을 언급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목표에 도달한다’는 생각으로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났다”며 “아무리 어려워도 ‘잘 될 거야’ 정도가 아니고 ‘다 된다’라는 초긍정 마인드를 가진다면 불경기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대구=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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