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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Do not 리스트] ⑩블랙리스트든 화이트리스트든 만들지 마라

입력
2017.05.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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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3회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3회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좌파 진보세력에게 편향된 정부의 지원을 균형 있게 집행하려는 정책, 즉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정책은 직권남용이 될 수 없다.”

2월 28일 열린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나온 김 전 실장 변호인의 말은 문화예술에 관한 박근혜 정부의 인식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진보 성향의 예술가를 추려 집요하게 불이익을 준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은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인식이 빚은 참극이라는 게 중론이다. 박신의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 교수는 “국내 문화정책 역사를 보면 애초에 문화를 정치 선전 도구, 검열의 대상으로 대해왔다”며 “김기춘 전 실장,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아직도 문체부 장관이 공신 자리 나눠먹기식으로 배분되는 게 현실”이라며 “문화예술을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라는 인식, ‘정권 홍보 수단’으로 보는 정치인이 남아있는 이상 블랙리스트의 근본적인 예방은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국내 정부 부처이름에 ‘문화’가 들어간 것은 1968년 문화공보부가 생기면서다. 그전에 공보처ㆍ공보부 형태로 공보, 즉 정권홍보를 담당했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여론통제를 강화하며 문화를 이용, 1968년 부서를 확대 개편했다. 공보 기능에서 문화를 분리한 것은 1990년, 체육과 관광 업무를 통합한 건 1993년, 1994년이다. 국민의정부에서 처음으로 문화부 예산이 전체 정부예산의 1%를 넘었다. 참여정부가 문화예술계인사 수백 명을 조사해 작성한 백서 ‘새 예술정책’은 여전히 한국 예술정책의 바이블로 꼽힌다.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이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비정상의 정상화 시기’로 꼽는 이유다.

박신의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실천했고, 문화예술교육정책이 출발했다”며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 등 문화예술관련 법제도 논의도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관주도의 정책 드라이브가 단기에 제도를 갖추고 안정화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다음 정부에서도 그것이 문화정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됐던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중앙정부, 예술 단체, 예술인 노조 등 각 주체에 맞는 역할이 있는데, 국내의 경우 정부의 영향력이 비대하게 커져 부작용이 생겼다는 진단이다.

김종덕(왼쪽부터)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덕(왼쪽부터)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3월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관련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대책’의 골자는 ▦예술위, 영화진흥위원회,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의 위원장 호선제 도입 ▦문화예술 지원 사업 심의 과정 공표 ▦‘예술가 권익 보장을 위한 법률’(가칭) 제정 등이다.

하지만 문체부의 대책에 대해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효과 없다”는 반응이다. 문화예술 공공기관장 A씨는 “블랙리스트 만드는 건 이미 범죄인데 안 만들면 되지, 예방 대책은 뭐냐.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라며 “제도를 구체화, 세분화시키면 공정성이 담보된다는 건 착각”이라고 꼬집었다. 문체부 고위 관료출신의 B씨 역시 “예술위 운영규정에 이미 청와대, 문체부가 관여 못하게 명시돼있다. 예술위는 문체부에 결산보고만 받고, (지원대상) 결정 과정은 정관에 따라 자율적으로 해야 되는 데 블랙리스트 사태는 위원장도, 직원도 이걸 못 지킨 결과”라고 말했다.

문화계 관계자들은 문재인 정부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일명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관계자들은 ‘팔길이 원칙’을 되살리기 위해선 ▦문화예술에 관한 사회 인식변화 ▦예술위 등 예술 지원기관 자율성 보장과 위상 회복 ▦사업단위 위주의 직접 지원 체계 개편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 우호적 문화인에 대한 의도적 지원과 비판적 문화인에 대한 배제를 동시에 막기 위해선 차제에 기금 운용 방향을 달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한 문화행정 전문가는 “국가 주도의 직접 지원 방식 자체가 문제”라며 “공적기금은 예술가 직접 지원이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는데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술인복지제도나 작업장 확충, 예술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 강화, 예술가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 등에 기금을 쓰고 각 위원회가 자율성을 갖도록 위상을 되돌려 놓은 뒤 문화부가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출판 지원책을 예로 들며 “세종도서사업을 그만두면 좋겠다”며 “정부가 (연간)150억원 들여 ‘좋은 책’을 사서 도서관에 뿌려주는 건데, 중앙정부가 일률적으로 뽑아 그렇게 한다는 게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백 대표는 “이런 사업에는 늘 뒷말이 끊이지 않는다. 장서구입비를 대폭 확충해 각 도서관이 알아서 사도록 하는 게 낫다”고 제안했다.

문체부 정책의 방향성 확립도 필요하다는 주문이 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아직) 블랙리스트 틀에 갇혀 문체부가 기본적으로 어떤 부처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다”며 “블랙리스트의 기본 출발은 예산 배분 실패로 문체부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사업을 한다는 전체 기조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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