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질게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박종철의 죽음은 그해 6월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항쟁의 신호탄이 됐다. 그보다 앞서 12년간, 남영역을 지나는 기찻소리 아래 수백 명의 비명소리가 사라졌다. 그 중엔 ‘여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서울 용산구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 서면 철길 너머 짙은 회색 건물이 시야를 압도한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건물은 서울 한복판의 아우슈비츠, 완벽한 ‘고문밀실’이라 불리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2018년 12월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돼 현재는 ‘민주인권기념관’이 됐다.

1976년 준공 후 약 20년간 수백 명의 ‘박종철’이 이곳을 거쳐 갔다. 공식기록을 통해 알려진 고문피해자만 400여 명. 평범한 시민이 끌려와 간첩으로 몰렸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1976년 유신정권 당시,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시국사범들을 전문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마련된 특수 수사 공간이었다. 흑벽돌이 쓰인 외관만 두고 보면, 김수근의 대표작인 ‘공간 사옥’(종로구 원서동)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거장의 건축 미학이 응집된 한 쌍처럼 보이지만, 그 쓰임새는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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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에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이 있었다. 이들은 30년이 넘는 시간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처를 외면하며 살아왔다. 삶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이 당한 피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들이 6ㆍ10민주항쟁 33주년을 맞는 지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간 ‘남성의 목소리’로만 기록돼 온 고문피해의 역사에 ‘여성의 목소리’를 보태고자 용기를 냈다.

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79년부터 1987년까지 각각 다른 시기에 남영동 조사실을 거쳐 간 박미옥(64), 유숙열(67), 황정옥(56)씨.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이들 고문피해자들과 함께 ‘치가 떨리는’ 그곳을 동행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덤덤했으며, 누군가는 끝내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들 모두에게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은 아직 종결되지 않은 비극의 무대였다.

박미옥(64)씨는 가장 가까운 남편과도 단 한 번도 고문피해에 대한 이야길 터놓고 해본 적이 없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문 장면을 재연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기라도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리모컨을 찾기 바빴던 것 같아요.”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그의 남편 역시 고문피해자였다.
◇1979년 박미옥, “남영동에 끌려간 지 3주 만에 9㎏이 빠졌더라고”

“사실 작년에 남영동엘 처음으로 다시 가봤어요. 내가 잡혀 들어갔던 게 1979년이니 벌써 40년이 지난 일이잖아요. 근데,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바로 몸이 떨리더라고…”

너무 오래 ‘모른 척’하며 살아왔기에,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졌을 줄로만 알았다. 막상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자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솟았다. 1979년, 당시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박미옥(64)씨는 스물세 살의 대학생이었다. 골방에 숨어 수천 장의 ‘삐라’에 “타도하자 박정희”를 옮겨 쓰는 것이 당시 그의 유일한 일과였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그가 만든 삐라가 소나기처럼 날렸다.

체포 당시 조간신문 사회면 한켠에 실린 박씨의 얼굴은 앳되지만 결연한 표정이다. “잡혀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 ‘반드시’란 확신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십대 여공들이 하루 16시간씩 일해서 받는 일당이 430원이었거든요? 대학생들이 음악다방에 가서 사 먹는 커피 가격이 딱 그 정도였어요.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거죠.”그래서 청계천변의 야학을 찾아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쳤다. 멀찍이서 어렴풋이 알 때보다 더 캄캄한 현실이 거기에 있었다. 더 널리,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다짐으로 가슴이 끓었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의 9호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당시의 욕조와 변기, 침대 및 철제 책상 등의 가구들을 최대한 당시와 같은 원형으로 보존했다. 중앙 세면대 위로 박종철의 앳된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의 그의 얼굴은 영원히 스물세 살이다.

하지만 남영동에서 그런 숭고했던 다짐은 소용이 없었다. “조사실 책상에 앉자마자 솥뚜껑 같은 손이 날아오더라고. 퍽하고 치니까 의자에서 그대로 나동그라졌어요. 그 유명한 고문경찰 이근안이었죠. ‘너 같은 건 죽여서 3ㆍ8선 근처에 갖다 버려도 아무도 몰라’라면서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어요.” 감각이 마비돼 밥을 먹지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밥을 먹이려고 했던 게 기억나요. ‘네가 밥을 먹어야 우리도 때릴 맛이 나지’ 그러면서.” 조사 중 혼절해 경찰병원으로 실려간 그의 몸무게는 38㎏이었다. 남영동에 끌려온 지 3주 만에 9㎏이 빠진 거였다.

문득 조사실 창문이 보였다. 어린아이 머리통 하나조차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폭이 좁았다. 자살이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치밀한 설계였다. “창문까지는 키가 안 닿더라고. 그래서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부서진 손목시계를 꺼냈어요.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세워서 손목을 그어봤지. 그게 될 리가 있나. 근데도 계속했어…” 그에게 고문보다 두려웠던 건,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사실까지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유숙열(67)씨는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일만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고초를 당했었는데, 남 일처럼 느껴질 수가 있나.”
◇1980년 유숙열,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모욕을 당했을까”

“1980년에 저는 기자였으니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어요. ‘시대의 격랑 속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한창 깊었던 때였죠. 그때 지명수배를 받던 선배가 대뜸 자길 숨겨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부탁이 나는 외려 고마웠어요. 내가 할 일이 이거였구나 싶어서.”

1980년, 합동통신 기자였던 유숙열(67)씨는 수배를 받고 도주 중이던 회사 선배 김태홍을 숨겨준 혐의로 체포돼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나는 그게 죄라고 생각 안 했어. 떳떳했으니까 끌려갈 때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는데… 거기서, 그 악명 높은 물고문을 당했던 거지.”

처음에는 기자라며 정중히 대했다.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자 ‘사람 죽어 나간 방으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 ‘칠성판’이라는 게 있었어요. 사지를 버클로 묶어서 결박하는 고문대였죠. 몽둥이를 든 남자 7~8명이 나를 거기에 묶고 육중한 남자가 올라탔어요. 그게 이근안이었죠.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숨을 쉴 수가 없었죠. 이런 고통이면 ‘안 한 것도 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가장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은 1987년 이후 독재 권력의 비호 아래 11년을 도망다니다 1999년에 붙잡혔다. 감방에서 7년을 보내고 출소한 그는 ‘반공목사’가 됐다. 1999년 체포될 당시의 이근안,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여름인데도 덜덜 떨리며 추위가 안 가셨어요. 그때 누가 들어와서는 나를 쓱 보더니 ‘쟤 전기했어?’ 그러더라고요. 아, 이보다 더한 고문도 있구나.” 그렇게 한바탕 당하고 문득 거울을 봤는데 하루 만에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해골 같았어요. 내 얼굴이… 그러고 나서 창문을 내다보는데, 세상은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더라고. 태연하게.”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저편엔 안온한 일상이, 이편엔 지옥이 있었다. “그 괴리감이 주던 낯섦, 쓸쓸함이 참 오래 남아 있던 것 같아요. 마음속에.”

신체적 고통보다 그를 오래 괴롭힌 것은 성적 모멸감이었다. “남자와 자봤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의도가 빤히 보이는 시답잖은 질문은 둘째치고… 숨겨주었던 김홍 선배와 저의 사적인 관계를 의심하고 도덕적인 훼손을 가하려고도 했죠.” 당시 수배 중이던 김 기자는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심지어 저를 담당했던 검사는 이랬어요. ‘너 그래 봤자 여잔데, 언론 자유 이런 거 신경 끄고, 그냥 시집이나 가라’고. 내가 남자였어도 그런 모욕을 당했을까 싶더라고요.” 이는 남영동을 다녀온 후 그가 여성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다.

고문피해자 황정옥(56)씨가 뒷문에서 5층 조사실로 바로 통하는 나선형 철제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 계단은 약 75~80도의 경사를 자랑한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구조다. 그 자체로 하나의 심리적 고문 도구였다. 5층 조사실에서 심문을 하다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면, 수사관들은 “이 새끼 안 되겠다, 지하실로 가자”며 눈을 가리고 팔을 결박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게 했다.
◇1987년 황정옥, “구치소에서 만난 여자들이 저를 다시 살아가게 했어요”

“저는 문제의 그 해, 1987년에 남영동으로 끌려갔었어요. 박종철 열사가 5층에서 죽음을 맞이한 날 저도 바로 그곳에 있었죠.”

1987년 1월 황정옥(56)씨는 박종철과 같은 층, 다른 방에서 그와 똑같이 물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을 하다 붙잡혀 조사를 받기 시작한 지 딱 이틀째, 사나웠던 고문과 구타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 즈음 또래 대학생이 고문 도중 숨졌다는 소식을 유치장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참담했어요. 철창 안에서 그를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죠. 그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현장에서 데모할 때 함께 부르던 민중가요였죠.” 박종철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나이도, 살아온 삶도, 처했던 운명도 비슷했다. 어쩌면 그가 박종철이 될 수도 있었다.

“욕조에 처박힐 땐, 이성이 마비되고 자기확신이 흐려지더군요. 수사관들이 잠시 나가고 변기에 앉아 있는데 욕조에 가득한 물 위에 제 머리카락이 둥둥 떠 있더라고요.” 수십 번씩 상상하며 각오했던 풍경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사무치게 무서웠다.

황씨는 스물두 살에 영등포의 한 방적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산골 벽지에서 올라온 십대의 여공들이 3교대로 일하며 밤엔 학교를 다녔다. 도저히 존엄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게 곧 ‘민주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며 자신이 없어졌다. ‘다시 노동운동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 시국사범들을 구치소에서 만났어요. 중앙정보부부터 보안사, 남영동까지… 고문받은 장소는 저마다 달랐지만, 마음의 상처는 닮아 있었죠. 밤마다 모여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했어요.” 누군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면 모두가 말없이 기다려줬다.

“특히 고문을 심하게 당했던 친구들, 수사관들에게 정보를 많이 줬던 친구들은 거의 정신이 파괴된 상태였죠. 자기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다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더라고.” 그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다독였다. “고문 앞에 장사 없다”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제때 풀어내지 못해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면 언젠가 곪아터졌을 상처였다. 그 시간들이, 그들을 다시 일어서게, 다시 살아가게 했다.

고문경찰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들이 보는 앞에서 다정하게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그들을 ‘악마’로 기억하지 않았다. ‘더 효과적으로 패려면,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해’라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은 ‘악의 평범성’ 그 자체였다. 1980년대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가 ‘망각’과 싸워야 하는 이유

남영동은 1987년 이후에도 몇 년간 건재했다. 치안본부의 후신인 경찰청이 넘겨받은 이 건물은 2018년까지 경찰 체력단련 공간으로 쓰였다. 참여정부 때 이 공간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경찰은 완강히 저항했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80년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의 진상을 캐는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가해자 중 대부분이 한 번도 ‘사죄’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박종철 사건이나 김근태 사건으로 이름이 알려진 몇몇 고문경찰 외에 남영동을 거쳐간 무수한 수사관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죽은 자’는 있으나 ‘죽인 자’는 없는 모순된 시간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이들은 33년이 지난 지금도 ‘망각’과 치열하게 싸워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도 독일은 나치 부역자를 찾아내면 형을 줘요. 나라가 행한 폭력을 나라의 손으로 벌 줄 때, 화해든 용서든 제대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많은 이들이 ‘과거는 과거로 남기라’고 ‘이제 그만 용서할 때도 되지 않았으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현대사의 비극은 ‘아직도 극복 중’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문소연, 이동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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