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여성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걷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8년 기준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일본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여성이 87.32세, 남성 81.25세다. 대표적인 ‘장수 국가’지만, 그 이면에는 생애 마지막 10~20년간 타인의 돌봄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발생하는 ‘간병 지옥’이 있다. 2017년 기준 가족의 간병을 도맡는 인구만 627만명에 이르고, 간병과 간호를 이유로 일을 그만두거나 이직하는 사람만 매년 10만명에 달한다.

‘유병장수’하는 노부모의 돌봄은 흔히 배우자보다는 친자녀, 기혼 자녀보다는 비혼 자녀, 정규직 종사 자녀보다는 비정규직 종사 자녀, 그리고 아들보다는 딸이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독신 세대부터 1980년대 싱글족을 거치며 비혼 여성이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일본 사회 특성상, 친족 돌봄의 알고리즘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은 자동적으로 바로 이 ‘비혼인 딸’이 될 수밖에 없다.

시노다 세츠코의 소설 ‘장녀들’은 바로 돌봄 노동의 책임을 온전히 떠안은 비혼 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돌봄 수요는 늘어나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제도는 턱없이 부족한 ‘돌봄 공백’ 상태에서, 자신을 갈아 넣어 그 공백을 메운 딸들의 내적, 외적 갈등이 현실적으로 펼쳐진다. 실제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20년 이상 돌봤던 작가의 경험이 다양하게 녹아들었다.

장녀들
시노다 세츠코 지음ㆍ안지나 옮김
이음 발행ㆍ340쪽ㆍ1만4,800원

책에는 세 명의 장녀가 등장한다. ‘집 지키는 딸’의 나오미는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온 40대 여성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물려준 땅과 집에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와 단둘이 남겨진다. ‘퍼스트레이디’의 게이코는 의사 집안의 장녀다. 의사들의 교양과 허세에 비판적이었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지만, 어머니의 병을 계기로 화목했던 가정이 어머니의 돌봄 노동으로 유지되어 왔음을 깨닫는다. ‘미션’의 요리코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어머니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받는다. 이를 거부하고 해외로 의료봉사를 떠나고, 아버지가 고독사하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들 장녀들이 구체적으로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높은 학력과 성공적인 경력을 가진 비혼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정체성을 갖는다. 사회적으로는 아무리 성공했을지라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지 못한 비혼 여성은 이와 관계없이 돌봄의 역할을 부여받거나, 혹은 자진해서 돌봄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돌봐야 할 대상은 나쁜 부모가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부모상보다 더 훌륭하게 양육의 책임을 다한 부모들이다. 자녀라면 응당 다해야 할 도리라는 일차원적 접근을 넘어, 받은 사랑을 되갚아야 하는 채무관계라는 점에서 장녀들의 죄책감과 책임감은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도쿄에서 노인 공경의 날을 맞아 열린 행사에 참석한 노인들이 나무로 만든 덤벨을 들고 운동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지난해 65세 이상인 노인 인구는 3,588만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때문에 소설에서 장녀들은 “왜 살아 있어?”라며 부모에게 증오를 쏟아 내다가도, 곧 “내가 눈을 떼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완벽하게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사랑할 수도 없는 대상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끝에 결국에는 “이대로 강제로 동반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만다.

여기에 장녀에게 짐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다가도 “네가 시집가면 난 어쩌냐”며 장녀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부모들의 절박한 속내까지 얽힌다. 서로를 잡아먹거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끝없이 번뇌해야 하는 돌봄 노동의 현실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얼마나 다를까. 한국은 이미 2017년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4.2%가 되면서, 고령화 사회(노인 비중 7% 이상)가 된 지 17년 만에 본격적인 고령 사회(노인 비중 14% 이상)로 진입했다. 24년이 걸렸던 일본보다도 빠른 속도다. 여기에 급속도로 증가하는 비혼과 이혼 비율을 고려할 때,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미래 역시 빤하다. 지금껏 장녀들에게 내맡겨 온 돌봄 노동의 책임을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그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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