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운동, 역사 앞에 서다] <1>할머니와 간극 못 좁힌 정대협
30년 활동 지켜본 원로 연구자들 “피해자 찾아 국제무대 문제제기엔 성공”
1995년·2015년 日 위로금 제안에 균열, 정부는 ‘의견 취합’ 정대협에 떠넘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달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호텔에서 두 번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구=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향해 던진 비판의 파장은 컸다. 무엇보다 30년간 이어온 위안부 운동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역사의 기로에 서게 됐다. 정의연과 위안부 운동의 모태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검찰 수사에 직면하면서 시민단체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과 방향 모색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1세대 원로들은 정대협의 30년 공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를 대리한 인권운동의 한계’를 이번 사태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들었다. 정대협의 30년을 지켜본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전 한국정신대문제연구소장)과 민병갑 미국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석좌교수 등 원로 학자들은 “시민단체가 피해자를 대리해서 인권운동을 하는 한 운동의 원칙과 피해자 요구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결과적으로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19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첫 정기수요시위. 정의기억연대 제공
1995년 일본 국민기금으로 갈등...배상 둘러싼 이견

정대협은 위안부 운동의 모범으로 출발했다. 1990년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결성한 정대협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던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나서는 일부터 시작했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정부도 위안부 이슈를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설득해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데도 성공했다. 1991년 8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핵심 동력이었다.

1992년 1월 첫 수요시위는 정대협이 인권운동 단체로 자리매김하는 데 분기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및 이듬해 추가된 △책임자 처벌 등 정대협이 내세운 7가지 요구 사항은 시민운동 단체의 강령 내지는 원칙이었다.

시민운동 단체로서 정대협이 내세운 원칙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지원이라는 또 다른 목표와 크게 상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5년 일본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제시하면서 균열이 시작됐다. 민병갑 교수는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식의 보상이었기 때문에 정대협은 거세게 반대한 반면, 7명의 피해자는 기금을 수령했다”며 “워낙 어렵게 산 분들이라 거절할 수 없다는 점을 일본이 파고든 셈”이라고 말했다. 민 교수가 언급한 7명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위로금 수령자다. 2014년 6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고노 담화’ 검토보고서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61명이 위로금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 설립총회가 열린 2016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오른쪽)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까지 이어진 국민기금 갈등은 2015년 일본이 다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위로금 지급을 시도하면서 반복됐다. 이용수 할머니가 앞서 기자회견에서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한 할머니가 화해치유재단 위로금을 받으려고 했는데 정대협이 회유해 못 받았다”고 말한 지점이다.

정대협은 그러나 보상을 원하는 할머니들의 요구를 조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들 목소리가 제각각이라는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강 연구원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스펙트럼 자체가 굉장히 넓다”며 “활동가들 이상으로 인권운동 의식 높은 분들, 그럴 여력이 없거나 배상만 원하는 분들 모두 피해자인 상태에서 피해자 의견을 무엇으로 볼지가 엄청난 과제”라고 지적했다.

윤미향 1인 체제 속에 후원금 문제로 폭발

할머니들의 분분한 요구 속에 정부가 정대협의 고군분투를 방치했다는 점도 원로 학자들은 지적했다. 할머니들의 의견 취합에 적극 나서지 않은 채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위안부 연구자는 “30년 동안 정부가 피해자의 의견을 정식으로 취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대협 혼자 그 과제를 떠안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대협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포함한 소수 활동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윤 의원이 정대협 대표를 맡은 뒤로 피해자 목소리를 ‘취사선택’하는 구조가 됐을 수 있다고 원로들은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대협 대표 출신 학자는 “운동이 너무 오랜 기간 한 사람에 집중됐던 것이 문제”라며 “소수가 운영할수록 의사결정 구조도 덜 민주적일 수밖에 없고 피해자들을 하나하나 살필 여력도 부족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병갑 교수도 “정대협 초기에는 대표만 2~3명에 실행위원도 6~7명이어서 집단 체제가 가능했다”며 “점차 위안부 연구자 수가 줄어들면서 윤 의원의 뒤를 잇거나 운동 방향을 섬세하게 고민할 활동가가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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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정대협에 눈길을 주지 않는 동안 후원금 문제 등이 자연스럽게 터졌다. 경기 안성 쉼터 및 각종 부실 회계 의혹에 대해 정의연은 “직접적인 피해자 지원뿐 아니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다양한 사업에 사용한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쓰라고 주는 기부금인데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원로 학자들은 할머니가 사용처를 몰랐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강 연구원은 “할머니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소통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운동의 중심인 할머니들에게 사업 취지 등을 충분히 설명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비정형의 가치…공론장 만들어야”

정의연 사태는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다만 주체는 정대협뿐 아니라 정부, 학계 등 관계자 모두여야 한다고 연구자들은 제언했다. 강 연구원은 “피해자 중심주의는 하나의 정답을 상정해두고 이를 맞췄는지를 재단하는 게 아니라, 끝없는 토론을 통해 다양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반영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정의연도 시민들 목소리를 더 듣고 확장해 나가는 계기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더불어 피해자 일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 교수는 “예컨대 고 김복동 할머니가 위안부 운동에 굉장히 헌신한 것은 맞지만 ‘김복동센터’처럼 1명의 공을 기리는 순간 정의연 메시지가 협소해진다”며 “아시아에 여러 위안부 피해자가 있기 때문에 국제적 단체로서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사업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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