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441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5월 7일과 25일 두차례 기자회견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30년간 이용당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 제기와 함께 정대협의 회계 부실,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의혹, 정치 입문 과정, 또 이용수 할머니의 배후설까지 가세하면서 사태는 점점 정쟁 이슈로 변질돼 갔다. 그 과정에서 30년 위안부 인권운동의 본질이 크게 훼손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위안부 운동의 본질은 첫째, 숨어 살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여성인권운동가로 성장해서 역사를 바꾸는 주체가 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존재가 바로 그 증거다. 본인이 아닌 친구의 이야기라며 위안부 사실을 알려 왔던 이 분이 기자회견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소개하며 논리적으로 당당하게 위안부 운동의 과제를 제시했다.

위안부 운동의 두 번째 본질은 이 운동이 국가의 힘이 아닌 전적으로 민간 여성운동의 힘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위안부 할머니의 기자회견장에 15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들 만큼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사회적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운동의 초창기에 정신대 문제는 입에 올리기 민망한 수치스러운 문제로 취급되었다. 최근까지도 우익 인사는 ‘자발적 매춘’ 운운하는 망신스러운 발언을 입에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도 언론도, 아니 한국사회의 전체가 외면한 위안부 피해자의 인권을 찾기 위해서 여성들은 외로운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학생들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입장문을 발표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민족의 수난과 성적 유린이 가장 첨예화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정치적 협상물이 아닌 민족사 복원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그해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ㆍ정의기억연대의 전신)를 결성했다. 그 다음 해인 1992년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에서 첫 번째 증언자로 나섰고, 정부는 1993년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숨어 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고 200명이 넘게 정부에 등록하게 됐다. 그 후로 위안부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전쟁범죄 참상을 고발했다. 국제 인권법정, UN 인권조사관의 보고서, 미국 의회 증언, 영화 제작, 소녀상 건립, 전시, 나비기금 지원 등 숨가쁜 행보로 세계평화운동사를 써나갔다.

회계의 부실이나 개인의 비리가 헌신과 고생으로 덮일 수는 없지만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는 구실로 악용되어서도 안될 일이다.

세 번째로 위안부 운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5월 27일 1441차 수요시위가 또 열렸다. 수요시위 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호가 있다.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제국주의는 13개국에서 20만명의 위안부를 공식적으로 강제 동원한 참혹한 전쟁범죄를 자행했지만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지금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과정이라는 뜻이다.

논란이 뜨거운 와중에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이 또 돌아가셨다. 올해로 벌써 세 분째 별세하셨고, 현재 생존자는 17명이다. 냉정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 우리의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될 것인지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이용수 할머니 문제 제기도 미래를 위한 준비로 소화되길 바란다. 투명성과 개방성을 갖춘 운영체계를 마련하라는 이용수 할머니의 제안은 사람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으로 운동방식을 바꾸라는 의미로 들린다. 성찰과 혁신을 거치면서 위안부 인권운동이 아픈 만큼 성장해 나가리라 믿는다.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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