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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담] “그는 미래를 산 대통령… 그래서 온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

입력
2020.05.21 20: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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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

 결혼 때 주례로 첫 인연, 이후 보좌진 합류 

 “노무현의 가치, 국민에게 대체로 승인돼… 

 미래의 민주주의 내다보고 준비한 대통령” 

내년 12월 개관을 목표로 짓고 있는 노무현시민센터건립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를 19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만났다. 그는 참여정부 청와대의 ‘마지막 대변인’이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내년 12월 개관을 목표로 짓고 있는 노무현시민센터건립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를 19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만났다. 그는 참여정부 청와대의 ‘마지막 대변인’이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미래 민주주의를 준비하고 방향을 제시한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사회에 남긴 유산을 천호선(58) 노무현재단 이사는 이렇게 압축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빛을 발한 질병관리본부도 노 전 대통령이 이전의 국립보건원을 질본으로 승격, 신설한 게 모태다. 2004년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으면서 감염병을 통합 관리하고 연구할 전문기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껴서였다.

천 이사의 이름 앞에 흔히 붙는 수식어는 ‘노무현의 마지막 대변인’. 참여정부의 마지막 10개월간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했고, 10년 전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엔 국민장 장의위원회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인생 2막을 여는 결혼식 때 주례사로 축복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에, 그 역시 마이크 앞에 서는 것으로 몫을 다 했으니 신기한 인연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23일)를 나흘 앞둔 19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천 이사를 만났다.

 -‘노무현의 마지막 대변인’이라는 호칭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청와대 근무하면서 의전비서관을 두 번 하고, 국민참여수석실 참여기획비서관, 정무수석실 정무기획비서관, 국정상황실장, 홍보수석을 했다. 심지어 중간에 한번 청와대를 나온 적도 있다. 그러다 다시 불려 들어가서 10개월간 대변인을 한 거다. 청와대 마지막 직함이 끝까지 가곤 하는데 장의위에서도 대변인을 했으니 뜻 깊다.”

 -노 전 대통령이 결혼식 주례를 선 게 첫 인연인가. 

“노 전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 시절 처(이원희씨)가 의원실에서 아르바이트(인턴 비서)로 일했다. 그 인연으로 결혼식 때 주례를 부탁 드리러 함께 갔다. TV나 신문 기사로 알고 있었지 실제 뵌 건 그때가 처음이다.”

 -1988년 12월 당시 만 마흔두 살이던 노 전 대통령의 주례사는 어땠나. 

“당시 긴장을 해서인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웃음) 다만, 하객들이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노 전 대통령은 이미 ‘5공 청문회 스타’로 큰 인기와 인지도를 얻은 상태였으니까. 권양숙 여사와 연애 시절 얘기를 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어려운 이웃의 고통을 나누면서, 사람이 산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희망을 갖고 살라’는, 진지한 말씀도 하셨다. 길었지만 유쾌했다.”

 -이후엔 노 전 대통령이 이광재 당시 보좌관(현 더불어민주당 당선자)과 함께 신혼 집에 찾아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아는데, 뭘 믿고 인생을 바꿨나. 

“당시 나는 학원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막판엔 꽤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과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였다. 재야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의원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건 한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남 창원시의 한 기업 철차공장을 방문했다가 당시 천호선 의전비서관(왼쪽)에게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을 보고 받고 있는 모습이다. 천 이사는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아는 대통령이었다”며 “대통령도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당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남 창원시의 한 기업 철차공장을 방문했다가 당시 천호선 의전비서관(왼쪽)에게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을 보고 받고 있는 모습이다. 천 이사는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아는 대통령이었다”며 “대통령도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당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실제 일해보니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어땠나. 

“인간적으로 실망해본 적이 없다. 국민들이 기억하는 따뜻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 그대로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몸에 배인 분이다. 반말을 거의 하지 않으신 건 유명하지 않나. 나이나 직분과 상관없이 참모들을 늘 동지로서 존중하고 수평적으로 대하셨다.”

 -이어 청와대에서 지켜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아는 분이었다. 임기 내 국정운영을 잘 해서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뿐 아니라, 그 이후의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늘 염두에 두는 분이었다. 정치나 정당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도 강조했던 거다. 선거제도 개혁 의지를 밝히면서 (당시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이나 당청 분리를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최근 이광재 당선자가 노무현재단의 11주기 특별 유튜브 방송에서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태종에 비유해 논란이 됐는데. 

“발언의 앞뒤 맥락을 살피지 않아 뭐라 언급하기 어렵다. 왕과 비교하는 식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다만, 노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개혁 군주인 정조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정조의 탕평책을 영조의 완론 탕평(緩論 蕩平)과 대비해 준론(峻論) 탕평이라고 하지 않나. 영조는 각 당파에서도 온건한 인사들을 등용했지만, 정조는 각 당파의 거두들과 적극적으로 토론을 하면서 국정운영을 했다. 노 전 대통령도 국무회의를 세 시간씩 할 정도로 토론과 논쟁을 즐겼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에 참여정부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진보정당에 몸 담았다. 나중엔 정의당 대표도 맡았는데. 

“대통령 후보 경선 시절부터 정당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이 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당내에선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을 만들어 흔들고 끌어내리려던 세력이 있지 않았나. 그 사건을 겪으면서 당원이 주인인 합리적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 전에도 이른바 ‘3김(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 시대’ 시절 제왕적 총재에 의해 지휘되는 정당 구조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그럼 내부에서 개혁할 건가, 아니면 나와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 건가 고민을 하다 후자를 택한 거다.”

천 이사는 2009년 9월 이병완 전 정책수석 등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과 국민참여당을 만들었다. 이후 진보신당 탈당파와 민주노동당까지 세 세력이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으나 비례대표 후보 경선 비리 사태를 겪으면서 결국 정의당으로 갈라져 나왔다. 천 이사는 정의당의 초대 대표였다.

 -참여정부 출신이 진보정당 대표까지 맡은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그 선택에 뭐라고 했을까. 

“찬성하지는 않으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소) 지금도 나는 정의당원이지만, 정당으로서는 더불어민주당이 노 전 대통령의 뜻을 잇는 당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정당 개혁이나 당원이 주인인 합리적 진보정당의 모델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내 문제 의식의 뿌리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천 이사는 ‘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결국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 간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발언에 담겼다고 꼽았다. 서재훈 기자
천 이사는 ‘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결국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 간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발언에 담겼다고 꼽았다. 서재훈 기자

 -노무현 리더십의 핵심을 꼽자면.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가 아닐까 싶다. 노 전 대통령이 처음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힌 게 2001년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에서다. 노 전 대통령이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링컨을 다시 공부하면서 리더십의 교훈을 되새기게 됐고, 이를 세 문장으로 압축한 거다. 링컨도 낙선을 여러 번 했고 지지 기반이 약해 임기 내내 (공화당) 안팎으로 공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했고 겸손한 리더십으로 미국을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노 전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다.”

 -11주기에 즈음한 오늘에 노무현 정신을 재해석해본다면 무엇일까. 

“노무현 정신은 ‘노동인권 변호사, 지역주의와 맞서 싸워 국민통합을 실현하고 싶어한 정치인, 국정운영을 총괄한 대통령, 진보의 미래를 성찰하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퇴임 이후’의 네 시기에 모두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건 서민에 대한 열정, 지역주의 극복 의지, 국정운영 과정에서 보인 겸손과 소통의 리더십, 그 과정을 성찰하면서 미래 비전을 제시하려 한 노력이다. 그 전체를 두루 봐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최종의 메시지는 결국 뭘까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 간다’는 것 아닐까. 그것이 곧 시민 민주주의이자 참여 민주주의다. 실제 퇴임 이후까지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노무현 정신에 비춰 현재 청와대나 더불어민주당을 평가해본다면. 

“생전 노 전 대통령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노무현의 시대’를 놓고 나눈 대화가 있지 않나. 유 이사장이 ‘노무현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고 했더니 노 전 대통령이 ‘그때 내가 있을까요’라고 했다는.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가 왔다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 정책의 방향은 대체로 국민 사이에 승인이 된 것 아닌가. 검찰 개혁이나 언론 개혁, 국가 균형발전(세종시 이전)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가 상대적으로 국가 균형발전 정책엔 집중하지 않고 있는 듯해 아쉽다. 정당과 정치 개혁을 위해서도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몫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추진단장인데. 

“내년 12월 개관이 목표다.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에 짓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강조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키우기 위한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다. 미디어센터, 강의실, 회의실, 공연장 등을 코워킹 스페이스(공간 공유) 시스템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미래를 내다보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나간 분이다. 일례로 코로나19 사태에서 질본의 역할을 다들 극찬하지 않나. 지금의 질본을 만든 게 참여정부 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이미 질병관리청 신설을 제안했다. 사스가 종식되고 난 뒤 2003년 7월 방역 평가보고회를 하면서 국가방역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 뒤 보건복지부에 질병관리청 신설을 검토해보라고 했다. 이어 이듬해 국립보건원이 질본으로 승격됐다. 당시 대통령의 고민은 안보의 개념을 국방ㆍ외교를 넘어 감염병, 중대 재해까지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넓혀 대응해야 한다는 거였다. 국가안전보장이사회(NSC) 산하에 위기관리센터를 둔 배경이다. 돌이켜보면, 미래를 대비한 의제를 참 광범위하게 수행한 대통령이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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