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캐릭터는 ‘벗길수록 잘 팔린다’, 오랜 시간 게임업계의 불문율이었다.

설정 나이 13세, 얼굴은 앳된 소녀지만 몸은 성인 여성이다. 롤플레잉 게임 '클로저스'에 등장하는 캐릭터 '레비아'의 모습이다. 남성 캐릭터가 "너를 길들여주겠다, 복종해라"라고 말하자 두 손이 결박된 채 묶여 있던 여성 캐릭터는 힘없이 '그러겠다'고 응수한다. 이 게임은 성인전용이 아닌 15세 이용가 등급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적과 장르, 형식을 불문하고 전 세계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외모는 하나같다. 왜곡된 몸매에 과장된 자세를 보이는 모습이 대다수다. 총탄이 날아들고 유혈이 낭자하는 전투현장에서조차 여성 캐릭터들은 ‘눈요깃거리’로 전시된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설정으로 흥행을 쫓는 게임의 ‘나쁜’ 법칙이다.

아동ㆍ청소년 성착취물 등을 유포한 ‘n번방’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면서 근절 법안까지 마련됐지만 게임이라는 가상의 현실에선 이처럼 소아성애,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아무런 제재 없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 일단 여자면 ‘벗겨라’

지난 2016년 넥슨이 300억을 들여 제작한 ‘서든어택2’는 남성의 성적 환상을 집대성한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장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 ‘미야’는 외모를 뽐내며 특수요원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고도의 그래픽 기술은 몸매를 강조하는 데만 동원된 것처럼 보였다. 사연이나 서사는 뒷전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할 때조차 가슴이나 엉덩이가 강조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많은 남성 유저들이 이 캐릭터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이유다. 이 게임은 여성을 전시 상품으로 내세워 돈벌이에 나섰다는 비판을 받았고, 출시 3개월도 안돼 서비스를 종료했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여성 캐릭터 묘사로 지난 2016년 7월 논란의 도마에 올랐던 넥슨의 ‘서든어택2’. 출시 직후 비판의 대상이 됐던 김지윤, 미야(왼쪽) 캐릭터는 삭제됐지만, 게임은 ‘자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는지, 개연성과 만듦새가 허술하다’는 평을 받았다.

2013년 미국에서 출시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랜드 테프트 오토 파이브(GTA-V)’는 더 심각했다. 게임은 일부 여성 캐릭터를 매춘부나 스트립댄서로 묘사했다.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여성에게 남성 캐릭터가 돈을 던져 준다거나 남성 유저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는 등 ‘여성 혐오적’ 설정이 난무한다.

2013년 북미에서 출시된 ‘그랜드 테프트 오토 파이브’에서는 일부 여성들이 매춘부나 스트리퍼로 묘사된다. 당시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기술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했을지 몰라도 시대착오적인 설정으로 불쾌감을 안겨주는 게임”이라고 평했다. GTA-V 게임 포스터
◇ ‘미소녀’ 치마 들추기에 혈안 된 한국 게임?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선 ‘소아성애적’모티프까지 등장한다.‘라스트오리진’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풍만한 몸매를 지녔고, 모바일게임 ‘언리쉬드’는 어린 소녀가 짧은 교복을 입고 신체 부위 대부분을 노출하는 캐릭터 일러스트를 선보여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극중 13세 설정이지만 성인 여성과 같은 몸을 가진 ‘클로저스’ 속 레비아 캐릭터. ‘클로저스’ 캐릭터 이미지컷

‘겉모습은 10대지만, 실제 나이는 수백 살’이라는 황당한 설정으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게임도 있다. 유저들을 이를 ‘합법 로리(법적으로 문제 될 것 없이 즐기는 소아성애 설정)’라고 일컫는다. 문제가 될 경우에 대비해 해당 여성 캐릭터를 삭제한 채로 등급 심의를 받은 뒤 ‘패치(Patch: 콘텐츠를 수정•보완하는 과정)’ 과정에서 되살려 내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해외 게임 개발자인 A(34)씨는 “함께 일하는 외국인 개발자 중 한 명이 ‘한국은 대체 왜 어린이 캐릭터의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보이게 만드냐’고 묻는데, 너무 부끄러웠다”며 “한국에서 일할 당시 아무리 이런 설정에 문제를 제기해도 단지 ‘여성’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묵살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이런 게임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건 일종의 즐거움이자 놀이다'라는 식의 비틀린 젠더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청각적으로 강한 자극이 계속 가해지다 보면, 나중엔 자극이 없으면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수준까지 갈 수 있게 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실제로 한국게임학회의 2018년 연구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게임 산업의 사회 및 문화적 쟁점’ 에 따르면, 성적으로 묘사된 여성캐릭터를 이용해 게임을 이용할 시 게임이용자의 실제 여성에 대한 공감능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선행 연구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가슴, 엉덩이 등이 비대하게 묘사돼 기괴한 느낌을 주는 ‘라스트오리진’의 여성 캐릭터들. ‘라스트오리진’ 캐릭터 이미지컷
◇ 장군ᆞ영웅은 남성 몫, 여성 캐릭터는 ‘내조’만

겉모습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북미 선행 연구들에 따르면, 게임 속 여성 캐릭터는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형상화될 뿐 아니라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로 머무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2014년 한국게임학회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배틀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는 남성 캐릭터의 평균적인 능력치가 여성캐릭터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소 모바일 게임을 자주 이용하는 방모(17)양은 “여성 캐릭터로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너는 여자니까~’ 라는 대사들이 자주 등장한다”며 “남성은 주로 전사나 장군과 같은 모습이지만 여성은 치료나 연주를 맡는 지원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남성 사용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게임 캐스터로 활동 중인 김경우(31)씨는 “게임 속 캐릭터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남성은 중년ᆞ노년이 많지만 여성은 10대~20대 정도로 제한돼 있다”며 “외국 게임의 경우 게임 속 이야기에 인종, 소수자, 젠더 등의 다양한 메시지를 담는 경우도 보이는데, 한국게임엔 그런 ‘문화적 코드’라고 할만한 게 거의 없다”고도 지적했다.

블리자드사가 개발한 ‘오버워치’ 속 성소수자 캐릭터. 왼쪽은 바이 섹슈얼인 ‘트레이서’, 오른쪽은 게이인 ‘솔져76’.
◇ 성별 구분 없애고, 여성 캐릭터에 서사 부여… ‘바뀌는 게임판’

최근 업계 내부에서 맹목적인 ‘벗기기’ 문화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변화의 바람은 해외에서 먼저 불었다. 미국 블리자드가 만든 ‘오버워치’는 여성 캐릭터로선 이례적으로 장애를 가진 60세 백발 노인 ‘아나’를 선보였다. 성소수자 여성 캐릭터인 ‘트레이서’가 뒤를 돌아 엉덩이를 보여주는 승리 자세로 유저들 사이에서 성 상품화라는 비판을 받자 개발진이 공식으로 사과한 후 바로 이 자세를 수정하기도 했다.

1996년 처음 출시돼 20년 넘게 장수하고 있는 비디오 게임 ‘툼레이더’.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의 의상은 ‘탐험’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비디오 게임의 고전인 ‘툼레이더’도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달라졌다. 오지를 누비는 탐험가 라라 크로프트는 1996년 처음 등장했을 당시 역시나 큰 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내는 탱크톱, 핫팬츠 차림이었다. 샤워를 하며 “이미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대사를 던지기도 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장면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주인공의 외형도 크게 바뀌었다. 비정상적인 형태 대신 팔과 어깨인 단단하게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모습으로 변했다. 바지도 긴 작업용으로 갈아입었다. 극중 설정에 제대로 들어맞는 외양을 뒤늦게 찾은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게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기게임 ‘콜오드듀티’의 최신작에서는 여성 전사 캐릭터들이 전시상황에 걸맞는 복장을 갖춰 입고 등장한다.

닌텐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성별에 따른 외모 설정 차이를 아예 없앴다. 동물의 숲 이미지컷

최근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닌텐도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아예 캐릭터의 성별 구분을 없애버렸다. 이전 시리즈에서 여성은 원피스 차림의 소녀로 남성은 짧은 머리 소년으로 설정됐지만, 올해 새롭게 발매된 에디션에서는 얼굴, 머리 모양, 피부색, 옷차림 등을 성별, 인종의 경계 없이 유저가 직접 설정할 수 있게 됐다.

0클로버 게임즈의 ‘로드 오브 히어로즈’ 속 여성 전사 캐릭터, 자이라.
◇ “이렇게 잘할 수 있는데 왜 여태 못했나?”

국내 게임 업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말 출시된 클로버게임즈의 모바일 게임 ‘로드 오브 히어로즈’는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은 입체적 설정의 여성 캐릭터를 다수 선보여 이용자들의 호평을 얻고 있다. 몸매가 부각되는 의상 대신 역할에 맞는 의상을 착용한다. 용맹한 전사, 노련한 통치자, 지혜로운 노인 등 그간 기존 게임의 여성 캐릭터에선 찾아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설정도 돋보인다.

이 게임을 즐겨 이용하는 박모(21)씨는 “여성 캐릭터의 노출 없이도 다양하고 멋진 캐릭터를 통해 충분히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는데 지금까지는 왜 못했나 싶다”고 말했다. 캐스터 김경우(31)씨는 “가족들과 함께 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며 “좋은 선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평했다.

’로드 오브 히어로즈’ 속 여성 노인 캐릭터 헬가.
◇게임도 ‘미디어’, 다양성 가치 못 담아내면 도태된다

전세계 게임 산업 규모는 150조 원에 육박한다. 게임은 이미 ‘문화 컨텐츠’의 한 축이 됐다. 한혜원 이화여대 교수는 “게임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사회의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인간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축”이라 일컬었다.

게임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도 확연히 달라졌다. 201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69.9%, 여성의 61.3%가 게임을 이용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도태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자 김모(28)씨는 “한국 게임업계는 ‘여성 유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다”며 “성 상품화를 일삼을수록 여성 사용자는 떨어져나갔고, ‘남은 사용자라도 잡자’며 더 심하게 여성 캐릭터를 벗기는 악순환이 계속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최근 신입사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예 게임 안에서 성별 구분을 없애 버리자’는 파격적인 주장도 나온다”며 “다양성이라는 시대의 가치를 게임 속에 녹여내기 위해서라도, 20대 청년과 여성 창작자의 목소리가 제작에 고루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업계를 떠나 해외 게임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개발자 A(34)씨는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벗겨야 팔린다’는 룰은 사실 가장 쉽고 저급한 방법”이라며 “성상품화 없이 게임 자체의 재미,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게 힘들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라고 꼬집었다. A씨는 “당장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 캐릭터들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기 보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대상화’ 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문소연 이동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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