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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디지털 성범죄 ‘시일야반성(反省)대곡’

입력
2020.04.08 18:00
수정
2020.04.09 09:14
26면
0 0

9개월 추적, 기사로 처음 사건 알린 ‘불꽃’

온라인 자발적 연대로 증거 수집한 ‘리셋’

이들이 행동으로 분노할 때 우린 뭘 했나

대학생 여성주의 연합동아리 ‘모두의페미니즘’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과 관련해 국회에 사이버성범죄 처벌법을 즉각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연합뉴스
대학생 여성주의 연합동아리 ‘모두의페미니즘’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과 관련해 국회에 사이버성범죄 처벌법을 즉각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연합뉴스

“실태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언론이 가만히 있을까 싶었죠.”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했습니다.”

‘추적단 불꽃’과 ‘프로젝트 리셋(ReSET)’의 첫발은 이런 절박함이었다.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집단 성 착취 사건을 공론화하고 추적한 건 언론도, 검찰이나 경찰도, 국회도 아닌 불꽃과 리셋의 여성들이었다. 사회를 감시해야 하는 언론, 범죄 수사와 처벌을 책임지는 검경, 입법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국회가 눈을 돌리고 있을 때 이들이 나섰다. 우리는 모두 이들에게 빚졌다.

기자를 꿈꾸는 불꽃 2인이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건 무려 지난해 9월. 연합뉴스 대주주인 뉴스통신진흥회의 첫 탐사보도 공모전 수상작이 이 사건을 9개월간 취재한 불꽃의 기사였다. 수상 발표와 함께 취재물도 홈페이지에 게시됐고, 이를 소개하는 기사도 여러 매체에 실렸다. “사건이 공개됐으니 연합뉴스나 신문, 방송에서 이 아이템을 더 심층적으로 다룰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성 언론이 보도하면 파급력이 클 테니 기대를 했죠.” 이상했다. 예상과 달리 조용했던 거다. 두 달여 뒤인 11월 말 ‘한겨레’, 이어 올해 초 ‘국민일보’까지 보도하고 나서야 불이 붙었다. 불꽃이 불씨가 돼 활활 타오른 순간이다. 그러길 바라 불꽃이라고 이름 지은 터였다.

리셋은 그때 뭉친 여성들이다. 텔레그램 성 착취 보도를 접한 이후 검색해 보니 손쉽게 채널 수십 개를 찾을 수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분노에 자발적으로 온라인에서 모여 실태를 수집하고 경찰에 증거로 제공해 왔다. 리셋의 목표는 그들의 이름에 담긴 뜻인 이것이다. “디지털 공간의 여성 안전을 다시(Re) 세운다(SET).” 서로 직업도,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비용은 사비로 해결한다. 후원을 사절해서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필요한 금전 지원은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이것은 가해자의 징벌적 손해배상 혹은 부당이득 몰수로 충당해야 합니다. 후원이나 모금은 대부분 디지털 성범죄의 주 피해자군인 여성들에게서 나오는 돈이기 때문에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이 답변은 우리를 향한 일갈이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까. “우리가 행동함으로써 바꿀 미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들이 행동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건 누군가.

우리가 진 빚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됐다. 얼른 떠올려 봐도 23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빨간 마후라 사건’이라는, 왜곡된 정체성을 부여한 ‘비디오 성 착취 사건’이다. 15세 소녀가 남자 고교생들에게 강간을 당한 뒤, 비디오물 촬영을 당했다. 영상은 오프라인으로, 온라인으로 퍼져나갔다. 이 인격 살해가 수십 년 이어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성 착취물을 ‘음란물’로 격하하고 “호기심에 본 게 무슨 죄야” “나만 봤나”하며 소비해온 행태는 26만명이라는 추악한 공범자 후예를 만들어냈다. 검경은 도리어 피해자들이 두려워하는 수사로, 법원은 피해자의 서사가 아니라 ‘초범’ ‘어린 나이’ ‘반성한다’는 가해자의 처지를 고려한 판결로 불신을 샀다. 보다 못해 국민이 나서서 디지털성폭력처벌법을 만들라고 청원했는데 국회는 폐기시켰다. 젠더 폭력은 미루고 미룬 ‘n순위 아이템’으로 다뤄온 언론도 면죄부를 받을 순 없다.

이메일로 만난 리셋은 “디지털 성범죄는 국회와 수사기관, 언론,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강간 문화를 자양분 삼아 자라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부디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용어를 써 달라”는 정명(正名)부터 부탁했다. 전화 인터뷰에 응한 불꽃은 “취재를 계기로 기자의 본분을 가해자들의 감시자, 피해자들의 변호자, 사건의 최전선에 서 있는 해결자로 확장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채무자들이 행동으로 빚을 갚아야 할 때다. 이미 이자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 무슨 면목으로 피해자들을 대면할 것인가.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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