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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공 선각자를 연결하는 비밀 고리들을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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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공 선각자를 연결하는 비밀 고리들을 찾아내다

입력
2020.02.21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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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활동한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과학과 문학, 신학을 넘나들고 당대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진리의 발견'이 소개하는 여성 선각자들의 원형이다. 1610년에 그려진 케플러의 초상화.
17세기에 활동한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과학과 문학, 신학을 넘나들고 당대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진리의 발견'이 소개하는 여성 선각자들의 원형이다. 1610년에 그려진 케플러의 초상화.

부제처럼 책은 ‘앞서 나간 자들’의 이야기다. 네 세기에 걸쳐 계주하며 ‘진리의 발견’을 위해 분투하는 주연은 10명이지만, 주변도 소외되지 않는다. 함께 출연하는 과학계와 문학계의 조연이 수십 명이다.

책은 끊임없이 다른 시공간의 인물과 사건을 포개며 연쇄 소환한다. 저들을 꿰매 엮는 도구는 원래 “보이지 않는”,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실이었다. 친구와 우연한 만남, 모임, 편지, 심지어 연인이 그들의 매개체다. 지난해 원저가 출간됐을 때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복잡한 태피스트리(다양한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라고 논평했다.

원제는 ‘피겨링(Figuring)’. 직역하자면 조형이나 형상화쯤 될 것 같다. 형체를 부여해 존재함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이는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다. 저자에게 케플러는 그가 소개하려는 선각자들의 원형이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과 현실의 물질 세계를 처음 연결시킨 천체물리학자”이자 훗날 뉴턴이 공식화하는 ‘중력’ 개념을 최초 제안한 인물이다. 케플러의 유산에는 과학ㆍ문학ㆍ신학이 착종돼 있고 대부분 여성에 성적 소수자인 케플러의 후예들 역시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과 아름다움을 치열하게 추구했다.

이뿐만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동의한 케플러가 1609년 완성한, 아마 최초의 ‘과학소설(SF)’일 ‘꿈’은 우주 중심에 지구가 있다는 동시대인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의도의 계몽 소설이기도 하다. 그는 대중의 편협한 시야를 넓히는 데 필요한 건 과학이 아니라 이야기, 즉 문학이라는 걸 알았다.

시인의 언어로 바다를 노래한 미국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
시인의 언어로 바다를 노래한 미국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

그러나 발상이 사달을 불렀다. 지구가 달 주위를 공전한다고 믿는 달 주민들은 정확히 동시대 지구인의 은유다. 둘 사이에 인과관계는 없다. 하지만 미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중세 사람들에게 정령을 소환해 아들이 달로 향하는 일을 돕는 소설 속 주인공의 어머니는 실제 마녀로 인식됐고, 케플러 어머니가 마녀로 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몰이해가 오인을 부른 것이다.

어머니의 수난이 케플러의 각성을 돕는다. 어머니가 사냥 당한 게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 그는 모친 사후 저작 ‘세계의 조화’에서 “천공을 아무리 뒤진다 해도 점성술사는 성별의 차이를 찾을 수 없다”며 성별 차이에서 비롯되는 운명 차이는 천공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이 땅 위 문화의 작용에 따른 성별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지적인 깨달음과 자아 실현의 기회를 하늘의 별만큼이나 불변의 자리에 고정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오래된 불평등 해소의 단초를 마련한 인물이 케플러다.

케플러가 주역인 제1장은 미국 작가이자 여권 운동가인 마거릿 풀러(1810~1850)의 마지막 29장과 호응한다. 풀러 묘비의 여섯 번째 구절, “나는 재능으로 세계의 일원이 됐다”는 “재능으로 세계에 속한다는 실존적인 상태가 인생을 실현하는 데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는 저자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미국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1818~1889),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1830~1908),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908),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1907~1964) 등 저자가 소개한 선각자들은 당대의 ‘성별 구조’를 극복해 천문학적 발견을 하고 시를 쓰고 환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자유도 책의 주요 테마다. 다양한 러브 스토리로 그려진다. 주인공은 대부분 동성애자ㆍ양성애자이거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를 맺는다. 저자는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썼다.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지음ㆍ지여울 옮김

다른 발행ㆍ840쪽ㆍ4만4,000원

불가리아 출신 작가ㆍ문화비평가인 저자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웹진 ‘브레인피킹스’의 편집장이다. “이 책에 내가 읽은 모든 책과 내가 품은 모든 생각을, 즉 나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다”고 했다. 책에 주로 참고된 자료는 등장 인물이 쓴 편지, 일기, 개인적인 글 들이다. 책은 선각자들의 도전사(史)에 대한 헌사(獻辭)지만, 저자에게도 도전이다. 인물들 간 비밀 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다. 인물에 초점을 맞춘 미시사인데, 과학사ㆍ문학사ㆍ예술사이기도 하다. 토성의 고리와 아버지의 결혼 반지에서 시작되는 은유의 고리가 연상 작용을 통해 끝까지 이어진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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