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정치인 A씨의 말. “유권자는 무자비하다.” 정치 경력 20년째인 그는 유권자를 두려워했다. “유권자는 모든 것을 기억하며, 용서하는 법이 없다. 때로 무능엔 눈감아도 오만엔 가차없다. 결정적 순간에 표로 다스린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오만이 가장 두렵다.”

권력자의 오만이란 무엇인가. 거칠게 정의하면, 뵈는 게 없는 것이다. 아첨하는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것, 나를 비판하는 사람은 가소로워 보이는 것. 지금 가진 한 줌의 권력이 ‘절대 반지’로 보이는 것, 그러나 권력에 태생적으로 새겨져 있는 유효기간은 보이지 않는 것.

그리하여 함부로 규정하고 감별하는 사람, 바로 오만한 권력자다. 요즘 여권엔 그런 사람이 많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선천적 장애인은 후천적 장애인보다 의지가 약하다’며 타인의 의지를 감히 계량했다. 정봉주 전 의원은 ‘진짜 민주당원 감별사’를 자처하며 ‘금태섭 의원은 가짜’라고 낙인찍었다. ‘안철수 싱크탱크 출신이 쓴 칼럼은 불순하다’며 임미리 교수를 고소한 민주당은 ‘권력을 비판할 자격’을 따졌다. 그리고 끝내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민주’라는 이름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정권의 열정적 지지자들은 ‘분노해도 되는 분노’를 판별하려 든다. “정부가 경제가 좋다는데 왜 앓는 소리냐” “못 가진 다른 사람들처럼, 정경심 교수가 ‘강남 건물’을 욕망한 게 무슨 죄냐” “대통령이 동성애를 반대해서 반대한다고 말한 게 잘못이냐…” 정권을 겨냥하는 검찰 수사에 제동을 거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그를 묵인하는 청와대는 사법의 정의까지 다시 쓰려 한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대다. ‘야당 복 덕분’이라는 논리는 너무 간편하다. 정계 은퇴를 앞둔 민주당 B 의원에게 그럴듯한 분석을 들었다. “지난해 서초동 조국 수호 집회에 나간 사람들이 전부 같은 생각이었을까. ‘검찰 개혁’만 외치고 ‘조국 수호’엔 입만 벙긋한 사람이 꽤 있었다. 촛불로 세운 정권을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마음들이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다.”

임미리 교수의 칼럼은 그 마음들을 투박하게 짚은 글이다.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 자괴감이 드는 마음들.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로비스트 ‘데보라 심’의 대사가 현실이 될까 걱정하는 마음들 말이다. 민주당이 임 교수 칼럼의 “민주당만 빼고”라는 여섯 글자에 격분한 건, 그 마음들을 여태 모른다는 뜻이다.

한국갤럽이 1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 마음들이 조용히 정권을 떠나고 있다. 중도층 응답자 사이에서 ‘이번 총선에서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답변(50%)이 ‘야당을 심판하겠다’는 응답(39%)을 추월했다.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달 같은 조사에서 중도층은 ‘정권 심판론’(37%)보다 ‘야당 심판론’(52%)에 기울어져 있었다.

대통령 지지율은 위험한 허상이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는 이번 총선처럼 집권 3년차를 맞은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였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완패했다. ‘정권 일방 독주, 야권 숨은 표 이끌어냈다.’ 선거 다음 날 한국일보의 해설 기사 제목이다. 50%에 육박한 이명박 전 대통령 지지율이 권력자들의 눈을 가렸지만, 유권자들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엔 발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두 번 나온다. 나는 발을 ‘권력의 은유’로 읽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직후의 김재규, 유럽 어느 나라에서 암살당하기 직전의 김형욱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본다. 구두는 벗겨지고 양말은 피에 젖어 있다. 권력은 그런 것 아닐까. 벗겨지는지도 모르게 벗겨지는 것, 선을 넘으면 자칫 피에 물드는 것. 그러므로 권력과 함께 가는 말은 언제나 두려움이어야 한다. A씨가 말한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문선 정치부장 moonsun@hankookilbo.com

※상세한 여론조사 내용은 한국갤럽이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c.g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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