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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천국 아르헨의 비극 “나라가 망해도, 당장 내 손해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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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천국 아르헨의 비극 “나라가 망해도, 당장 내 손해는 싫다”

입력
2020.01.23 04:4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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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사회, 신음하는 지구촌] 1부 <6> 아르헨, 부패한 포퓰리즘의 귀환

개혁 실패ㆍ공공요금 600% 폭등… 부패로 쫓겨난 前정권 재집권

남편 이어 대통령 지낸 페르난데스, 부통령으로 컴백해 수렴청정

지난해 10월28일 대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오른쪽)가 부통령으로 복귀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과 함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10월28일 대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오른쪽)가 부통령으로 복귀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과 함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칠레 산티아고를 떠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미니스트로피스타리니 국제공항에 도착한 지난해 11월 25일.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받으러 걸어갈 때부터 공항은 시끌시끌했다. 단체로 축구팀 저지를 입은 100여명의 사람들이 입국장에서부터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중 나온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축구팀)리버플레이트 원정 응원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틀 전 페루 리마에서 열린 남미 축구클럽 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경기를 보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그들의 노래와 함성은 승전가처럼 들렸기에 경기 결과를 몰랐던 기자는 “이겼나 봐요?”라고 물었고, 통역은 “브라질 플라멩구에 1-2 역전패했다. 이기나 지나 저런다”고 당연한 일인 듯 말했다. 생경한 장면이 떠나지 않아 이튿날 40년 넘게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 사업가 강모(61)씨에게 전했더니 “걸핏하면 국가에서 돈 나눠주지, 좋은 고기 먹고 와인 마시지 축구나 보면서 즐기는 것”이라며 “오죽했으면 칠레 시위에서 ‘우리보다 못 산다는 아르헨티나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우리는 왜 이러느냐’는 말이 나왔겠나”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27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이대혁 기자
지난해 11월 27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이대혁 기자

연금으로 사는 나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너무 해 주지 않아서 시위가 폭발한 칠레와 달리 아르헨티나는 대다수 국민들이 연금을 받는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아동수당 등 전통적 연금은 물론이고 애를 낳아도, 학교에 들어가도, 가난해도, 심지어 시위를 해도 돈을 준다. 일명 ‘프랑(PLAN)’이다. 전통적인 연금도 포함되지만 일회성이 강한 사회복지금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강씨는 “하도 연금 수가 많아서 정치인도 수천개 정도로 알뿐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며 “이런 걸 시도 때도 없이 뿌리니 재정이 남아 나겠나”라고 혀를 찼다. 이어 “국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받는 등 불행한데, 국민들은 프랑 받아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정부에 따르면 연방 정부 한해 예산의 75%가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의 월급과 함께 프랑과 같은 복지제도, 공공기관 지출에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이 줄인 게 이 정도다.

펼치지 못한 날개 ‘마크리스모’

11월 27일 찾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카사 로사다(Casa Rosada)’ 건물. 우리말로 ‘분홍빛의 저택’이라는 뜻의 대통령궁이다. 주변엔 주요 은행들과 정부 건물들이 위치한 중심지로, 평소에는 소규모 시위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곳이다. 하지만 기자가 찾은 날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했다. 현지 통역은 “경제 붕괴로 마음이 떠난 국민들이 마크리의 재선을 용인하지 않았다”며 “이미 국민들 마음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당선자와 부통령 내정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에게 쏠려 있어 이곳은 조용하다”고 말했다.

5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우파 성향의 마크리의 집권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70년간 아르헨티나 사회를 지배했던 좌파 ‘페로니즘(1946년 집권한 후안 페론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이 주도한 10여년간의 대규모 무상복지 정책)’의 변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마크리스모(Macrismo)’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그는 실제 아르헨티나 재벌 기업 ‘소크마(Socma)’의 2세로 유명 축구팀 보카주니어스의 구단주 출신 기업가이기도 했다. 마크리는 집권 이후 국가의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했다. 무역규제를 철폐하고 외국인 투자 유치 등 친기업행보도 이어갔다. 2002년 이후 동결됐던 가스, 수도, 전기, 교통 등 공공부문 보조금도 삭감했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등 체질 개선에도 힘썼다.

하지만 경제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이런 체질 개선 노력은 삶이 팍팍해진 국민들에게는 무의미했다.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보조금을 삭감한 결과, 공공요금은 300~600%나 급등했다. 국민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리카르도 로젬베르그 국립 산마르틴대 교수는 “그나마 프랑을 어느 정도 유지했기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앴으면 칠레와 같은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8월 11일 아르헨티나 중간선거 결과. 당시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중간선거에서 15%포인트 차이로 뒤지면서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10월 28일 대선에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에게 참패를 당하고 정권을 넘겨줬다. 현지 언론 라 나시옹.
지난해 8월 11일 아르헨티나 중간선거 결과. 당시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중간선거에서 15%포인트 차이로 뒤지면서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10월 28일 대선에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에게 참패를 당하고 정권을 넘겨줬다. 현지 언론 라 나시옹.

부통령발 포퓰리즘의 부활?

결국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마크리를 끌어내렸다. 지난해 10월 28일 대선에서 중도좌파연합 ‘모두의 전선’의 후보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현직 대통령 마크리를 제치고 당선됐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대통령에 당선된 알베르토보다 부통령이 된 전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주목한다. 크리스티나 부통령은 앞서 아르헨티나에서 대통령직을 맡은 두 번째 여성이자, 직접 선출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며 재선대통령(2007~2015년)으로 더 유명하다. 남편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대통령 재임기간(2003~2007년)을 포함해 총 12년간 ‘키르츠네르주의(Kirchnerismo)’라는 포퓰리즘 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알베르토 대통령이 이전까지 인지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에서는 “크리스티나의 수렴청정”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크리스티나 부통령의 포퓰리즘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 그의 키르츠네르주의는 석유회사와 연금을 국영화했고, 공공지출을 크게 증가시켰다. 에너지ㆍ교통요금 보조, 공기업 적자보전, 사회보장 확대 등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다. 마크리 정부 시절이긴 하지만 2018년 IMF로부터 500억달러가 넘는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크리스티나 재임시절 재정적자 탓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욱이 크리스티나 부통령은 많은 범죄에 연루된 피의자다. 그는 공공 건설 사업 발주를 대가로 1,800억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18년 기소됐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횡령은 물론 심지어 살인 교사 의혹도 제기된다. 현지에서 만난 로베르토 이탈리티(69)씨는 “모두 20개가 넘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상원의원으로, 앞으로는 부통령으로서 면책 특권을 누린다”며 “그런 그를 다시 뽑았다는 것은 그만큼 마크리에 대한 불신이 컸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로젬베르그 교수는 “마크리가 잘한 점은 페론당 이외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임기를 마쳤다는 것뿐”이라고 혹평했다. 마크리 전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이 부패한 포퓰리즘을 귀환시켰다는 얘기다. 한 사업가는 “이번 정권 교체는 개혁이고 뭐고 당장 내 앞의 이익이 줄거나 불이익이 닥치는 것보다 부패하든 말든 내 이익을 뺏지 않을 사람을 더 선호한다는 의미”라며 “아르헨티나 정치인에게 정치는 산업이고, 영업방식은 포퓰리즘”이라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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