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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조는 취미인가

입력
2020.01.13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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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짧은 금발 커트 머리, 하나는 긴 금발 곱슬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둘 다 남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둘 다 여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는 여자 하나는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하나는 짧은 금발 커트 머리, 하나는 긴 금발 곱슬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둘 다 남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둘 다 여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는 여자 하나는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정조는 취미다!

-충격적이지요? 거의 백 년 전에 나온 얘긴데.

-정확하게는 85년 전이지요. 나혜석이 1935년에 ‘삼천리’에 게재한 ‘신생활에 들면서’라는 산문에 썼던 문장이니까.

-요즘도 여성 작가가 공개적인 고백 형식으로 말하기 힘든 이야기죠. 나혜석이 선구자적 인물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만큼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

-화가, 작가, 지식인으로서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 사람이었어요. 누구와 연애했고,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떤 과정을 밟아 이혼하게 되었는지, 신문과 잡지에서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끊임없이 추적했죠.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이에요. 그게 꼭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위치와 힘이 있으니, 그 시절 여성으로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선언할 수 있었겠지요.

-가부장제가 지금보다 훨씬 공고한 사회였잖아요. 말할 수 있는 위치와 힘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주류 이념을 거스르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요.

-그런데 ‘취미’라니,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확한 문장은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미술 공부를 한 사람이니 칸트 미학에서 말하는 ‘취미 판단’의 개념으로 쓴 것 아닐까요? 유용함이나 교훈 같은 맥락을 배제하고, 오직 쾌/불쾌 같은 주관적 감정으로 판단한다는 뜻으로.

-조금 혼란스럽네요. ‘정조’를 과연 혼자 밥을 먹고 떡을 먹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정조는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계약에 가깝잖아요. ‘내가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우지 마’ 라는 노래 가사가 있듯이, 보통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의무고요. 이런 태도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지만, 권력의 차이가 개입하지요. 가부장제에서 정조가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의무였던 이유고요.

-그래서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나혜석, ‘경희’) 라고 부르짖은 거 아닐까요?

-어느 책에선가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읽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 구체적 존재로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였어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현상 세계 밖에 존재하는 완벽하게 둥근 원 같은 거죠. 저 문장 속 ‘사람’은 그 시절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 읽혀요.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 여자, 남자와 동등한 일과 행동을 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주체적 여성의 전범이 거의 없던 시절이니까. 지금도 나혜석에게 ‘상류층 여성이 불륜 행각을 벌이다 말년에 비참하게 추락했다’라는 평을 하잖아요. 마치 그 사람이 자신에게 닥칠 고통을 예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듯이. 그는 알았어요. 그래도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발언했어요. “최후는 고통 이상의 것을 만들고 맙니다” 라고.

-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을 본 적 있어요. 몇 년 전 베네치아의 리도섬에 간 적이 있었어요. 해수욕장에서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둘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둘 다 상체는 맨몸이고 트렁크 수영복만 입고 있었어요. 하나는 짧은 금발 커트 머리, 하나는 긴 금발 곱슬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둘 다 남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둘 다 여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는 여자 하나는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궁금했죠. 아이들을 붙잡고 물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을 무너뜨리기 싫었거든요.

-그 느낌 알 것 같아요. 정조만 취미가 아니라, 성별도 취미라 해야겠군요!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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